▲박지극 시집 <피라미는 하늘을 날고> 표지
박지극
시인은 시를 쓴다. 한 편 한 편 공들여 시를 쓴다. 시가 모이면 시집도 낸다. 박지극 시인도 지난 20일<피라미는 하늘을 날고>라는 시집을 펴냈다. 도서출판 나무에서 펴낸 이 시집은 70편에 이르는 신작을 4부로 나누어 실었고, 발문은 고희림 시인이 썼다. 출간을 기념하는 작은 모임이 10월 30일 오후 6시에 대구 수성못 입구 파동로 48길 5-30 '착한전복'에서 열릴 예정이다.
시인이 시집을 내는 것은 자식들이 한 울타리 안에서 살기를 바라는 부모의 심정과 같다. 자식들이 뿔뿔이 흩어져 사실상 이산가족처럼 살아가는 것을 결코 원하지 않는다. 부모는 그저 자식들이 언제든지 서로 만날 수 있고, 삶의 애환을 정겹게 나누는 모습을 볼 수만 있다면 행복하다.
하지만 그런 부모가 늙어서는 오히려 자식처럼 되어버린다. 언제나 앞에 서서 자식을 이끌어주고, 뒤에 서서 밀어주고, 곁에 서서 보살펴줄 것만 같던 부모가 세월의 무게에 짓눌린 나머지 어린 아이 같은 모습으로 변해버린다. 박지극 시인은 병상에 누운 모친의 발톱을 깎아드리며 어머니의 일생을 돌이켜본다.
발 톱― 어머니 1병상에 누운어머니 발톱을 깎는다발톱에서 소리가 난다봄날 소녀 적팔랑거리는 붉은 댕기 소리끝도 없이 한적한 소쩍새 소리현해탄 건너오는 연락선 고동 소리 B-29 비행기 소리피난 가라는 사이렌 소리멀리서 포탄 터지는 소리아이들 울음소리덜거덕 덜거덕 쫓겨 가는 달구지 소리아이들 학교 가는 소리 설거지 하는 소리빨래 방망이 두드리는 소리이웃 아낙이 엄마 부르는 소리.
해설이 별도로 필요하지 아니한 깔끔한 수작이다. 발톱을 깎을 때 나는 소리에서 시인은 어머니의 소녀 시절을 떠올린다. 봄날 소녀 때 어머니는 팔랑거리는 붉은 댕기를 휘날리며 들판을 뛰어다녔다. 끝도 없이 한적한 소쩍새 소리가 들리는 그런 전원이 소녀의 놀이터였다.
해방이 되고, 연락선이 현해탄을 건너왔다. 시만 읽고서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짐작으로는 소녀의 남편이 될 청년이 그 연락선을 타고 왔을 듯하다. 이내 전쟁이 터졌고, B-29가 하늘을 어지럽게 날고, 멀리서는 포탄 터지는 소리가 요란했다. 아이들은 울고(그 아이들 중에 갓난 아기인 박지극 시인도 있었다), 쫓겨 가는 달구지는 덜거덕 덜거덕 소리를 내었다.
전쟁은 끝나고, 아이들은 학교를 다녔다. 시인은 학교를 오갈 때 어머니의 설거지 하는 소리, 빨래 방망이를 두들기는 소리도 들었다. 이웃 아낙이 엄마를 부르는 소리도 들었다. 이제 어머니는 소녀가 아니지만 이웃아낙의 부르는 소리에 마실을 나가기도 했다. 붉은 댕기를 휘날리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어머니는 밝은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그 뒤, 시인은 더 이상 시를 잇지 않는다. 까닭은, 어머니가 더 이상 말씀이 없기 때문이다. 시인의 어머니는 지난 5월 돌아가셨다. "내 시가 부끄럽다"는 시인은 "부끄러운 시를 지난 5월 영면하신 나의 어머니께 바친다"고 고백한다. 시인은 우리나라 역사의 한 부분을 살다 가신 어머니의 생애가 시만큼이나 함축적이라고 느끼고 있다.
그래서 시집 <피라미는 하늘을 날고>에는 어머니를 노래한 시들이 많이 실려 있다. <발톱>보다 시기적으로 먼저 쓰여진 <외가 동네>도 그런 시편 중의 하나이다. 이 무렵은 어머니가 아직 말을 잃은 것은 아니었고 '말수가 줄어든' 경지였다. 어느날 시인은 어머니를 모시고 외가 동네를 방문했다.
외가 동네 지금은 없어진 저녁밥 짓는 굴뚝 연기 쇠정지*에 걸린 붉고 푸른 천 조각들장독대에 얹어둔 냉수 사발외사촌 누이와 공기놀이 하던 회나무 그늘외삼촌이 한 줌 쥐어주던 노란 찐쌀닫힌 외갓집 녹슨 대문 말수가 줄어든 어머니아, 동구 밖 냇가드문드문 선 키 큰 미루나무들 보이지 않고강가의 눈부셨던 하얀 몽돌들 검은 이끼가 끼고옹기종기 모여 앉은 초가지붕들 군데군데 빈 집으로 버려져 있다.시 속의 쇠정지는 경상북도 청도군 금천면 임당리의 산자락과 마을이 만나는 지점이다. 마을사람들은 계곡물이 모이는 이 곳을 쇠정지라 불러 왔다. 물론 시인이 고향을 노래하는 것은 어머니를 자작시 안으로 모실 때와 같은 심정이다. 어머니는 시인에게 있어 곧 고향이고, 고향 산천은 어머니의 소녀 때 붉은 댕기머리, 전쟁 때 아이들을 안고 피난가던 모습, 이웃 아낙들과 담소를 나누던 정경까지 모두 담고 있는 커다란 자연의 그릇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