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나는 50불을 주고 산 중고 스터드베이커 승용차로 매 주말 왕복 1천 마일(1600km)의 구애 대장정에 들어갔다. 1960년대 형 스터드베이커(Studbaker) 세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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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석사 학위 과정을 밟는 동안 나는 뜻하지 않게 일생일대의 '횡재'를 하게 되었다. 그동안의 횡재는 잠시 잠깐 경제적인 어려움을 극적으로 극복한 것이었으나, 이번의 횡재는 일생을 두고 계속될 횡재였다.
그 횡재는 미시간의 봄날에 찾아왔다. 여의도 공항에서 진한 감동을 주며 나의 기억 저장소에 담아 두었던 여자가 갑자기 캠퍼스에 나타난 것이다. 그녀의 이름은 김명연, 공항에서 떠나던 날 평생 잊을 수 없는 선물을 한 이화여대생이었다. 노라노 양장점에서 구한 새 와이셔츠를 수줍게 다른 사람을 통해 들려 보냈던 그녀를 나는 잊은 적이 없다. 북에서 혈혈단신 탈출하여 고아처럼 지낸 오빠 친구가 유학을 간답시고 나와 서 있는데, 그 초라한 모습이라니. 그녀는 내가 입고 있던 낡은 와이셔츠에 너무 가슴이 아팠었다고 한다.
미주리 주립대학에 막 유학을 왔다는 그녀는 미시간 주립대학에서 공부하는 친구를 만나기 위해 이스트 랜싱에 왔다고 했다. 50여 명의 한국 유학생들이 왁자지껄 떠들고 있는 주말 피크닉 장소에 그녀를 대동하고 나타나자 난리가 났다. 한국 여자 유학생은 고사하고, 한국 아줌마조차도 보기 힘든 대학 캠퍼스에 묘령의 여학생이 나타났으니 그럴만도 했다. 1시간 반 거리의 디토로이트 공항에 한국 여자가 내렸다더라는 소식만 들어도 서로 마중을 나가려고 안달이던 유학생들이었다. 그날 피크닉은 김명연이라는 여학생의 눈길을 잡기 위한 피크닉이 되고 말았고, 나는 갑자기 '의혹'과 '시샘'의 표적이 되었다.
그녀를 미주리로 떠나 보낸 며칠 후 50불을 주고 중고 스터드베이커(Studbaker)를 구입했다. 그리고 기나긴 1천마일의 '구애 대장정'이 시작되었다. 매주말 나는 수업이 끝나자마자 미시간의 이스트 랜싱에서 미주리 스프링필드까지 차를 몰았다. 무려 500마일, 하루종일 달려야 하는 거리였다. 그곳에서 1년 반 가량 유학생활을 했던 나는 하루나 이틀 친구 집에서 머물며 그녀를 만나고는 일요일 밤 늦게 미시간으로 돌아왔다.
나는 공부에 미친 것만큼이나 그녀에게 조용히 미쳐있었다. 말이 500마일(805킬로미터)이지 부산에서 평양을 거쳐 신의주까지 가는 거리보다 먼거리다. 서울~부산 거리(약 430킬로미터)로 치면 약 두 배 되는 거리를 주말에 두차례 왕복한 셈이다. 모두가 바위를 뚫을 만한 젊음 덕분이었다.
특별한 일이 있을 때를 빼놓고는 매주 나는 왕복 1000마일(1610km)의 거리를 오가며 속을 태웠다. 신기하게도 1962년도를 전후로 미국의 유명한 혼성그룹인 피터 폴 앤 메리가 부른 '500마일(500 miles)'이라는 노래가 유행했던 것이 기억난다. 어쨌거나 나는 500마일 거리를 중고차로 왕복하며 그녀를 만났지만, 단 한마디도 '사랑한다'거나, '좋아한다'거나 하는 말을 하지 못했다. 아니, 할 수가 없었다.
내가 누군가. 부모도 없고, 돈도 없고, 학벌도 학력도 별볼일 없고, 장래도 불확실한 내가 아닌가. 그녀는 누군가. 부친은 정부 고위관리에, 경기여고와 이화여대를 졸업한 미모의 유학생이 아닌가. 연애결혼이 흔한 지금과는 달리 그때는 양가집 처녀라면 눈들이 높아서 확실한 집안의 확실한 학벌.학력의 장래가 촉망되는 청년이 아니면 거들떠 보지도 않던 시절이었다.
그녀는 처음부터 '공부를 하러 왔다'고 못을 박아 말할 만큼 단단한 방호벽을 치고 있었다. 미시간의 피크닉 장소에서도 다른 유학생을 대하는 태도를 보고 마음 속으로 크게 낙담했었다. 나를 대하는 태도와 그들을 대하는 태도에서 큰 차이를 느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자신을 만나기 위해 왕복 1천마일을 달리는 나의 심정을 모를 리가 없을 터이지만, 속이 깊고 침착한 표정의 그녀는 늘 온화한 볼우물의 미소로 나를 대했다. 딴은, 그렇게라도 해서 만나 준 그녀가 고맙기는 했지만, 일방적인 사랑의 뒷맛은 늘 씁쓸하고 허허롭기만 했다.
종종 편지를 통해서 이리 돌리고 저리 돌려서 겨우 '고백'이라는 걸 했으나 묵묵부답 모르는 체 했다. 이제나 저제나 고백할 기회만을 보기로 하고 나의 말없는 구애 대장정은 계속됐다. 그리고 드디어 그 기회가 왔고, 나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이번에도 미시간의 대 자연이 실마리가 되어 주었다. 아주 자연스럽게.
캠프 미니왕카의 녹음 속에서 약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