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전띠? 안전벨트? 딸과 말다툼했다

[569돌 한글날] 우리말 우리글 사용 풍경

등록 2015.10.09 17:13수정 2015.10.09 2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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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둥이는 다섯 살이다. 어린이집에 다닌다. 아침 출근길마다 태워다 준다. 지난 7일 아침이었다.


"아빠, 안전벨트 안 매면 안 돼요?"

목소리에 살짝 짜증이 묻어났다. 여느 때 같으면 혼자서도 제법 맬 줄 아는 녀석이다. 옆자리에 앉은 오빠에게 부탁한다며 '정중히' 거절하기도 한다. 오늘 아침에는 뭔가 기분이 언짢았던 모양이다.

"똥이(별명)가 경찰 아저씨한테 벌금 낼 거야?"
"…."
"5만 원이나 내야 하는데?"

막둥이는 체념하듯(?) 눈길을 돌렸다. 가는 길에 나는 한 마디 덧붙였다.

"똥아, '안전벨트'가 아니라 '안전띠'야."


입이 댓발이나 나온 채 앉아 있던 똥이가 화난 목소리로 답했다.

"아니야. '안전띠'가 아니라 '안전벨트'야."
"아니야. '안전벨트'가 아니라 '안전띠'야."


안전띠? 안전벨트?

 안전띠냐 안전벨트냐 그것이 문제로다.
안전띠냐 안전벨트냐 그것이 문제로다.public-domain-image

'안전띠'와 '안전벨트' 모두 <표준국어대사전>에 등재된 단어다. '안전띠'는 '안전벨트'의 순화어다. '안전벨트'를 찾아보면 "안전띠로 순화"라고 적혀 있다. 순화어라지만 사람들은 관행적으로 '안전벨트'를 더 익숙하게 쓴다. 외래어 '벨트' 대신 순우리말 '띠'를 쓴다고 해서 의미가 더 자연스럽고 정확히 통한다고 장담하기 힘들다. 오히려 "'띠'가 뭥미(뭐지)?" 하는 식의 '반의사소통적' 상황이 연출될 수 있다.

글로벌 시대에 낯선 외국어가 밀려드는 건 어쩔 수 없다. 그런데도 외래어나 외국어를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고 쓰는 세태는 여전히 받아들이기 힘들다. 왠지 불편하다.

영어 단어 'center'(센터)가 들어가는 건물명이 많다. 거의 예외 없이 '○○센터'로 적는다. 영어 계통 이름이라면 '○○ CENTER'처럼 전체를 로마자로 도배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십수 년 전 중국에 가서 큰 인상을 받은 것 중 하나가 길거리 간판에 적힌 '○○中心'이었다. 영어 단어 'center'를 자기네 언어인 변신시킨 게 그 '中心'이었다. 사실 '센터'와 '중심'의 어감 차이가 매우 큰 것처럼 느껴진다. 원래 그랬을까. 그랬을 것 같지 않다.

우리는 "SM5"라 쓰고 "에스엠 파이브"라 읽는다. "에스엠 오"라 읽으면 안 될까. 애초 '미리내'니 '강물'이니 하는 우리말로 차 이름을 지어 전 세계에 내보내기 시작했다면 어떻게 됐을까. 교실 칠판에 'SM5'와 '에스엠5'를 함께 써놓고 "에스엠 오"라고 읽으면 아이들이 낄낄거리고 깔깔거린다.

"뭐예요 선생님" 하며 항의(?)하는 아이들도 있다. 왜 그렇게 읽느냐는 게다. 그럴 때 아이들에게 되묻는다. "너희는 왜 '에스엠 파이브'라고 읽니?" 별다른 대답을 하지 못한다.

135만5천 원을 '135,5000'으로?

'하이'나 '굿 모닝'이 자연스러운 우리말 인사처럼 쓰이고 있다. 마트 전단에 박힌 '1+1 행사'는 거의 모두 '원 플러스 원 행사'로 읽는다. 관행적인 쓰임새와 의사소통의 편리함(?)과 영어세계화의 이름으로 '국영문혼용체'[좀 더 정확히 말하면 국로(마자)혼용체가 맞겠다]를 쓴다.

서양식 수 표기는 천 단위로 끊어 적는다. '천 원'은 '1,000원'이다. '만 원'이면 '10,000원'으로 적는다. 서양식으로 적혀 있는, 동그라미가 여러 개 있는 수를 볼 때마다 나는 오른쪽 끝 영부터 일일이 '일, 십, 백, 천' 세가며 전체 수치를 읽어낸다. 여간 불편하지 않다.

우리말 식 수 표기는 만 단위를 기준으로 하게끔 돼 있다. 원칙대로 한다면 '만 원'은 '1,0000원'으로 적어야 한다. '일백오십삼만 오천 원'은 '135만 5천 원'이나 '135,5000'으로 적으면 된다. 앞쪽 세 숫자인 '135'가 '일백삼십오'로 읽히니, 여기에 '만'만 붙이면 전체 수 크기를 자연스럽게 알 수 있다. 제법 편리한 방식이다.

요새는 이렇게 우리말 식 표기를 따르는 서적이나 언론 보도문이 제법 나오고 있다고 한다. 올해 초 전라북도교육청의 탈핵 교과서 <탈핵으로 그려보는 에너지의 미래> 발간 작업에 동참했다. 교재 특성상 수 표기를 여러 곳에 해야 했다. 집필진 회의에서 수 표기 세칙을 어떻게 할 것인지를 놓고 회의를 했다. 우리말 식 표기 방식에 '불안해 하는' 분이 몇 분 계셨지만 현행 어문 규정에 맞춰 만 단위로 끊어 적는 방식으로 결론을 내렸다. 하지만 우리 사회의 대세와 주류는 여전히 '불편한' 서양식 표기다.

막둥이의 단어 목록 속에는 '핑크'가 있을 듯하다

 세종대왕은 '핑크'를 당연히 모르겠지...
세종대왕은 '핑크'를 당연히 모르겠지...김지현

한순간 막둥이와 나의 실랑이는 침묵 속으로 빠져들었다. 그때 옆에 있던 일곱 살짜리 둘째가 끼어들었다. '지혜로운 판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빠, 똥아, '안전벨트'나 '안전띠'나 다 같은 거야."

그러자 식식거리던 막둥이가 최후의 한 마디를 던졌다.

"아니라니까. 어린이집에서 '안전벨트'라고 했어. 그럼 아빠는 안전띠 매. 나는 안전벨트 맬 테니까."

'안전띠'가 아니라 '안전벨트'를 매는 막둥이는 '핑크색'을 좋아한다. '분홍색'은 안 좋아한다. 어린 시절 배우는 언어가 모어(mother tongue)다. 특별한 사정이 생기지 않는 한 아이들은 6세 전후에 자신의 모어를 완전히 습득한다. 지금쯤 막둥이의 모어 단어 목록에는 '벨트'와 '핑크'가 들어가 있을지 모른다. 어떻게 봐야 할까. 오늘은 10월 9일 한글날이다.

○ 편집ㅣ김지현 기자

덧붙이는 글 제 오마이뉴스 블로그(blog.ohmynews.com/saesil)에도 싣습니다.
#한글날 #우리말 #모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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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민주주의의 불한당들>(살림터, 2017) <교사는 무엇으로 사는가>(살림터, 2016) "좋은 사람이 좋은 제도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좋은 제도가 좋은 사람을 만든다." -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 1724~1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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