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북 지역에서 민란을 일으킨 두건덕의 고향은 고성으로 서커스로 유명한 오교 부근이다. 사진은 오교의 시장 모습.
최종명
두건덕(窦建德)은 장남(漳南, 하북 고성故城) 사람으로 어릴 때부터 약속을 천금처럼 잘 지키는 것으로 유명했다. 빈곤한 동네에 살며 사람들이 부모 상을 당하면 밭을 갈다가도 즉시 달려가 장례를 도왔으며 필요한 물품을 내주기도 해 사람들로부터 칭송이 자자했다.
이런 성품 덕분에 마을 이장을 하기도 했는데 두건덕의 부모 장례식에 천여 명이나 찾아와 예물을 주려고 했으나 가난한 사람의 사정을 생각해 모두 사절했다고 <구당서(旧唐书)>에 기록돼 있다. 오늘날에도 본받아야 할 인품이다.
고구려 침공에 대한 전국적 반발이 거세지고 홍수가 발생해 백성들이 도망치고 난민이 많아질 즈음, 마을 주민 손안조(孙安祖)의 집이 떠내려가고 부인과 아이가 굶어 죽는 일이 생겼다. 홀로 남은 손안조에게 군대에 들어가라는 현령의 조언을 거부하자 잔인하게 곤장 치도곤을 당했다. 손안조는 현령을 죽이고 도망쳐 두건덕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백만 대군을 이끌고 요동 정벌에 나섰다가 고구려에 대패한 올해 홍수가 발생해 백성은 빈곤하건만 황제는 백성의 마음을 자세히 살피는 '체혈민정(体恤民情)' 하나 없이 또 다시 요동으로 독려하고 있습니다. 예전 서방을 정벌할 때 입은 손상이 아직도 회복되지 않고 백성의 피로가 극심한데 연이어 전쟁이니 일년 내내 사람들은 집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있습니다. 또다시 출병한다면 세상은 동란이 일어나기 십상입니다. 사내대장부가 죽지 않고 공을 세워 업적을 세워야지 어찌 도망치다가 포로의 운명으로 세상을 마칠 것입니까? 내가 잘 아는 지인이 있으니 거기에 가서 숨어서 의적으로 생활하다가 기회를 틈타 사람과 말을 얻어 시국이 동요할 것이니 반드시 일어나 한바탕 경천동지할 대업을 벌여보시오."두건덕이 손안조에게 한 말인데 어쩌면 스스로에게 하고 싶었던 말일지도 모른다. 두건덕은 병역을 거부하고 도피했거나 집도 절도 없는 사람 수백 명을 모아 손안조를 대장으로 황하 인근의 험난한 근거지로 도피시켰다.
도적이 들끓고 있던 시기였지만 두건덕이 사는 고향만 아무런 피해가 없었던 것은 이런 내통이 있었던 것이다. 이를 이상하게 여긴 관청이 손안조를 비롯한 도적들과 결탁했다는 밀고와 의심으로 두건덕의 가족들을 모두 잡아들였다. 두건덕이 소식을 들었을 때는 이미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모두 살해 당한 후였다.
두건덕은 전 가족이 몰살 당하자 더 이상 참을 수 없어서 수하에 있던 장수 이백 명을 이끌고 당시 수현(蓨县, 하북 경현景县)에서 봉기한 고사달(高士达) 군대에 합류했다. 이때 손안조가 사망하자 함께 하던 수천 명의 군사들도 두건덕을 찾아와 투항했으며 동고동락의 동지가 돼 함께 군세를 확대해 나갔다.
616년 탁군(涿郡) 유수(留守) 곽현(郭绚)이 만여 명의 토벌군을 이끌고 진격해 오자 고사달은 지혜와 책략이 두건덕에 미치지 못한다고 생각해 군사마(军司马) 직책을 양도하고 군권을 전부 일임했다.
두건덕은 고사달과 짜고 둘 사이에 내분이 일어났다고 선전하고 포로 중 한 명을 두건덕의 부인으로 위장해 공개적으로 살해해 기정사실로 믿게 했다. 두건덕은 거짓 항복 후 기습공격으로 토벌군을 전멸시키는 전공을 세웠다. 도주하는 곽현을 참수해 수급을 고사달에게 바치니 두건덕의 권위가 날로 높아졌다.
수나라 조정은 고관인 태복경(太仆卿) 왕의신(杨义臣)이 또다시 만여 명의 토벌군을 이끌고 공격해 왔다. 맞서 싸우면 불리하니 도주했다가 몇 개월이 지난 후 급습하자는 두건덕의 의견을 무시하고 직접 공격에 나선 고사달은 5일만에 참패하고 목숨을 잃었다. 왕의신이 공격해오자 군사들은 두려움으로 뿔뿔이 흩어졌으며 두건덕은 수백 명의 군사만 이끌고 도주한 후 요양(饶阳, 하북 형수衡水)에 이르러 군사를 정비했다.
두건덕은 고사달의 시신을 수습해 따뜻한 곳에 안장한 후 장례식을 거행했으며 전군에 흰색 상복을 입게 했다. 제각각 도망했던 군사들이 다시 모이니 수천 명의 군대로 복귀했다. 사기가 다시 충천해지자 복수를 위해 수나라의 관리와 지방 유지를 모두 처형하자는 목소리가 높았으나 두건덕은 흥분을 누르며 반드시 '마땅한 예의로 상대해야 한다'고 타일렀다.
이 소문을 전해들은 요양 현 장관(长官, 중앙에서 파견한 현령)이 투항해 두건덕을 귀빈으로 여기고 수나라를 토벌할 대계를 상의했다. 이후 수나라 군현의 장관들이 점점 현을 내주고 투항하는 사례가 늘어나자 군대의 기세가 날로 번창했으며 수많은 인재와 병사가 모여 십만 군대의 명성을 쌓기에 이르렀다.
수양제가 우문화급에 의해 살해되자 618년 두건덕은 그 옛날 천명을 받은 하우(夏禹)를 따른다는 취지로 국호를 하(夏)라고 선포하고 왕이 됐다고 <구당서>는 전하고 있다. 이때부터 호랑이의 위세와 용의 위엄을 지닌 호거용반(虎踞龙蟠)의 명성을 얻으며 하북 일대를 장악했다.
문경지우가 원수가 되다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