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로 가는 사람들
NARA / 이도영
'골로 가다'의 실체그 하나는 그분은 왜 당신 발로 '골로 가다'의 그 산골짜기로 갔을까 하는 점이었다. 나는 어렸을 때 '골로 간다'는 말을 자주 들으며 자랐다. 은사 조동탁(조지훈) 선생의 '사쿠라론'에 따르면, 이 '골로 간다' 말은 6.25 전쟁 전후로 유행한 속어로 '산골짜기로 간다'는 뜻이라고 한다. 그러면서 이는 곧 '아무도 몰래 죽인다'는 말이라고 풀이했다. 나는 실제로 이 말의 어원이 되는 골로 가는 장면을 사진으로 직접 봤다.
2004년 백범 암살 배후를 규명하고자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에 갔을 때 제주 출신으로 '백조일손'의 후손 고 이도영 박사가 당신이 발굴했다면서 나에게 기증했다. 1951년 대구 근교 부역자 처형 장면을 담은 이들 사진 6매에 따르면, 관계 당국자들이 부역 혐의자들을 산으로 데리고 간 다음 자기 무덤을 파게 한 뒤 총살시킨 후 처형 집행자들이 삽으로 그 무덤을 덮는 장면이었다.
장준하 선생은 '골로 가다' 말의 의미도, 또 그런 세태도 잘 아셨을 것이다. 그런데도 가족이나 믿을 수 있는 동지와 동반도 아닌, 홀로 경기도 포천 약사봉 험한 산을 찾은 것은 '섶을 지고 불로 뛰어든 꼴'로 내내 안타까운 마음 금할 수 없다.
감시의 공포그 둘은 1963년부터 1975년 포천 약사봉에서 의문의 죽음을 당할 때까지, 아니 사후까지 중앙정보부의 감시를 받고 사신 점이 매우 가슴 아팠다. 다른 이나 전문 정보기관으로부터 감시와 도청을 당한다는 것은 체험해 보지 못한 사람은 그 공포감과 불편함을 모를 것이다.
나는 2005년 5월 25일, 안동문화방송국 '혁신유림' 특별취재팀의 코디 역으로 중국 동북 삼성항일유적지 답사 길에 나셨다. 그날 이른 아침, 단둥 압록강 강가에서 압록강 철교를 촬영하다가 중국 공안에게 영문도 모른 채 연행되었다. 다행히 선양 영사관의 도움으로 풀려났지만 우리 답사팀 일행은 랴오닝성을 벗어날 때까지 사흘 동안 중국 공안은 우리 취재팀을 철저히 미행했다.
그 이튿날 고산자 신흥무관학교 옛 터를 찾아가는데 중국 공안 두 대의 승용차가 마치 개구리 노는데 뱀처럼 우리 일행을 노려보면서 신경을 건드렸다. 그때마다 머리칼이 쭈뼛 섰다.
나는 1980년 초 당시 사형수(김대중 전 대통령)의 막내아들 김홍걸군을 학교에서 가르쳤는데 그는 도통 말이 없었고 침울해 보였다. 어느 날 그가 모처럼 나에게 던진 한 마디는 "선생님, 저희 집은 정보부에서 감시하기에 대문을 열어둬도 도둑이 얼씬도 안 해요"라고 했다. 그 감시가 얼마나 철저했으면 생기 발랄할 청소년의 말조차 앗아가게 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