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은 그냥 산이라고 하는 것도 산맥이라고 볼 수 있다. 중국에서 장백산은 협의로는 백두산이지만 백두산을 포함한 기나긴 산맥을 광의로 장백산이라 부르는 것일 뿐이다. 산동의 장백산은 수나라의 고구려 침공계획으로 인해 발발한 민란의 근거지이다.
최종명
백두산, 중국은 장백산(长白山)이라 부른다. 장백산이라 불린 것은 12세기경 여진족의 금나라가 중원을 장악하고 있을 때부터였다. 북위 때에는 도태산(徒太山)이었고 당나라는 태백산(太白山)이라 불렀다. 서안 남쪽 진령산맥(秦岭山脉)의 주봉을 태백산이라 한다. 우리나라 강원도에 있는 태백산과 이름이 같다.
당나라 시대에는 지금의 백두산이 태백산이기도 했다. 산 이름만 놓고 보면 역사 이야기를 제대로 하기 어려울 정도로 복잡하다. 왜 산 이름을 자주 바꾸는 것일까? 산세가 바뀔 만큼 기나긴 시간도 아닌데 말이다. 게다가 산동지방에도 장백산이 있으며 적어도 수나라 당시에는 그렇게 불렸고 지금은 장백산맥이라는 이름만 남아있다.
사실 중국은 그냥 산이라고 하는 것도 산맥이라고 볼 수 있다. 중국에서 장백산은 협의로는 백두산이지만 백두산을 포함한 기나긴 산맥을 광의로 장백산이라 부르는 것일 뿐이다.
나는 세상을 꿰뚫어 보는 장백산 도적보라 내 모습! 붉은 옷 비단 바지 입었다네!긴 창 공중을 반으로 가르듯 휘두르니눈 부신 햇살 머금어 칼날이 번쩍이네!산에서 토비처럼 노루와 사슴을 먹고 살며산을 내려가 도적으로 지주의 소와 양을 먹고 사네.관군이 침범하면 앞서 나가 칼을 들고 맞설 거야.어차피 요동으로 가면, 헛되이 죽느니만 못해설령 내 머리 잘린다 해도 뭐 어떠리! '세상을 꿰뚫어 보는 강도' 지세랑(知世郎)이란 별명으로 유명한 왕박(王薄)이 쓴 '요동에서 헛되이 죽지 않으리(无向辽东浪死歌)'라는 시로 청나라 가경제 때 관리였던 두문란(杜文澜)이 편찬한 고대 민요와 속담 수록집 <고요언(古谣谚)>에 기재돼 있다. 수양제(隋煬帝)는 당시 돌궐을 진압해 서북 방면을 안정시킨 후 고구려 침공을 준비했는데 오랜 전쟁과 대규모 운하 건설, 자연재해, 농민수탈에 이은 계급 모순이 겹쳐 인민의 삶은 피로가 가중되고 있었다. 게다가 민간에는 '한번 가면 언제 돌아올지 모르고', '전쟁에 이겨 장군들은 상을 받을지 몰라도 나만 들풀처럼 죽는다.'는 노래가 유행하며 요동병역(辽东兵役)을 거부하는 추세였다.
610년에 이르러 고구려 침공을 준비하며 탁군(涿郡, 북경 인근)에 백만의 군사를 집결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농민을 동원해 양식과 무기를 이동시켰다. 한번 차출된 자는 다시 돌아오지 못하고 상당수가 목숨을 잃었으니 경작할 인원이 부족해 전답은 황폐해졌다. 안문(雁门, 산서 대현代县)과 동도(东都) 낙양에서는 흥분한 농민들의 폭동이 일어났으며 전운이 감도는 조정 분위기와는 달리 백성의 고통은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을 정도로 처참했다. <자치통감>은 당시 사회 분위기를 상세하게 기록했다.
고구려 토벌 계획을 위해 산동에 부서를 설치하고 말을 기르고 군역을 징발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민부(民夫)를 동원해 쌀을 운반해 쌓게 하고 소달구지가 가더니 돌아오지 않았으며 사망한 병졸이 과반이 넘었다. 경작할 때를 놓쳐 전답은 황폐해지고 기근이 겹쳐 물가는 오를 대로 올랐다. 탐관오리가 설치고 백성은 가난이 극심해 재물은커녕 추위와 굶주림을 감당할 수 없었다. 죽음의 공포가 몰려오고 약탈이 자행되었는데 군도(群盗)가 모이기 시작했다.
수의 고구려 침공 1년 전인 611년, 수해로 산동과 하남 일대 30여 군이 수몰되자 대지가 엉망진창으로 변했는데도 고구려 침공 계획에 따라 세금 징수와 병역 징발은 멈추지 않았다. 산동 추평(邹平) 사람인 왕박은 참다못해 병역을 거부하고 민란의 깃발을 들었다. 산동은 수군의 집결지로 군함 건조로 인한 고통이 가중돼 있었기에 장백산을 근거지로 삼고 시를 지어 '민심을 추동'하니 각 지방에서 병역을 거부하고 도피했던 농민들이 분연히 일어났으니 수나라 말기 거대한 농민봉기의 서막이었다.
왕박의 민란군이 수차례 관군을 격퇴하며 1년 만에 수만 명으로 늘어나자 노군(鲁郡, 산동 연주兖州)을 빼앗아 근거지를 확대할 계획으로 남쪽으로 진격했으나 수나라 장군 장수타(张须陀)가 이끄는 군대와 태산에서 벌인 전투에서 패배했다.
장수타의 기습작전에 말려 잔여 병력 1만 명을 이끌고 북쪽으로 달아났으나 토벌군의 추격을 받아 임읍(临邑, 산동 덕주德州)에서 다시 패전했다. 왕박은 두자강(豆子冈, 산동 혜민惠民)에서 봉기한 손선아(孙宣雅)와 평원(平原)에서 봉기한 학효덕(郝孝德)과 연합해 십만의 병력으로 정비한 후 다시 남하해 장구(章丘)를 공격했다. 그러나 장수타의 정규군 2만 명과 싸워 승리하지 못하자 이후 몇 년 동안 다른 지역 민란군을 지원하고 연합전투에 참가할 뿐 산동 북쪽 일대를 근거지로 관망했다.
619년에 이르러 왕박은 수양제를 살해한 우문화급(宇文化及)에게 투항했으며 우문화급이 당시 민란군 두건덕(窦建德)에 의해 포위당하자 기회를 틈타 민란에 합세했다. 얼마 후 당나라를 세운 이연(李淵)에게 항복해 종군했다. <신당서(新唐书)>에 따르면 622년 왕박은 군량 창고인 담주(潭州)와 수창(须昌, 산동 동평东平)을 공략하는 과정에서 의견이 맞지 않아 자사 이의만(李义满)의 옥사를 방조했다가 그의 조카 이무의(李武意)의 복수 때문에 살해당했다.
왕박은 수나라 말기 스스로 병역을 거부하고 민란의 지도자로 나섰으며 전국적 민란의 포문을 연 장본인으로 기록된다. 수당영웅(隋唐英雄)이 판치던 시대에 세상의 이치를 깨닫고 '강도'에서 지세왕(知世王)으로 불리며 장군으로서의 면모도 남긴 민란 주동자였다.
와강채로 집결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