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 립스틱들
LariKoze
미국에 오고 나서 한국에선 한 번도 바르지 않았던 새빨간색 립스틱을 바르기 시작했다. 표면적인 이유는 한국에서 매일 하던 눈 화장을 하기가 귀찮아서다. 그냥 비비크림만 바른 얼굴로 다니자니 그렇지 않아도 이목구비 뚜렷한 이런 외국인들 사이에서 너무 희미해 보이는 느낌이라 입술에 포인트를 주고자 함이었다.
하지만 다른 이유가 하나 더 있었으니, 그건 '쎄' 보이고 싶어서다. 나는 아시안, 특히 한국인이다보니 자연스레 몸에 배어있는 '예의', '예절'이라는 게 있다. 또 어려서부터 종가집 딸래미답게 부모님께 항상 '예의 바르게 행동해야한다', '먼저 양보하고 져주는 게 이기는 것이다'라는 얘길 듣고 자라 그런 것에 예민한 편이다.
그래도 대학에 들어가고 나이 들면서 적어도 내 것은 챙길 줄 아는 성격으로 바뀌었고, 미국에 와서 살다보니 한국에서 보다 예의, 예절 같은 것에 덜 신경을 쓰며 지내고 있다.
하지만 시댁(격 없고 친구같이 좋은 시부모님이지만) 가까이에 사는 데다 자주 만나니 거창한 예절까진 아니라도, 자연스러운 양보나 배려같이 최소한의 예의를 지키려 노력하는 탓에! 결국 이 곳 사람들과 비교해서 나는 굉장히 순해 보이는 것이다. 그냥 순해 보이기만 하면 그럴 수도 있겠다. 하지만 너무 만만하게 보이기까지 하는 것이 문제였다.
미국에 온 지 얼마되지 않았을 때, 남편 스캇의 동네 친구들과 다 같이 어디 놀러가 술을 마셨던 적이 있었다. 스캇 친구들이라 해봤자 무리들 중에 스캇이 제일 나이가 많고, 동갑이 두어 명. 나머지 열댓 명의 친구들은 다 20대 초반의 어린 애들이다. 그래서 그런지 가끔 보면 철없기도 하고, 미성숙해 보이는 느낌도 들었지만 나에게 해를 가하지 않는 이상 그냥 그러려니 했다.
그런데 그날, 다들 술을 좀 마셔 알딸딸해있을 때 어떤 여자애가 자기 남자친구와 대화하면서 나와 스캇을 가리키며 놀리는 제스처를 취했다. 그 여자애는 내가 자길 못 보고 있다고 생각했겠지만 나는 분명히 봤다. 사실 지금 같았으면 당장 걔한테 가서 "너 방금 뭐라고 했니? 내 앞에서 다시 한번 말해볼래?"라고 했겠지만 그때는 미국에 온 지도 얼마 되지 않았고, 또 어쨌든 쟤들도 남편 친구인데 나쁘게 대해서 좋을 것 없다는 생각으로 그냥 넘어갔다.
하지만 나도 성인군자는 못 되는지라 그 이후로 그 여자애와 그 남자친구를 볼 때마다 기분이 나쁜 거다. 이것들이 내가 아시아에서 방금 왔다고 무시하나, 내가 맨날 웃으며 상대하니 만만하게 보이나, 내가 지들처럼 욕 섞어가며 개념 없이 남 뒷말하고 떠드는 게 싫어 입 다물고 있었던 건데 내가 생각도 없는 사람같나... 나도 한국에선 한가닥 했는데.
아시안이라고 무시하나? 그래서 바른 립스틱그래서 나도 그날부터 (굉장히 유치하지만) 내 나름의 대응을 했다. 굳이 먼저 인사 안 하기, 괜히 미국 스타일로 밝은 척 "Hey~ how are you doing? you look so nice today~" 같은 입발린 소리 안 하기, 내가 먼저 말 걸지 않기, 선한 눈빛 같은 건 내버려두기, 형식적으로만 대하기.
그렇게 그 이후로 몇 번 마주칠 때 마다 저렇게 행동하니까, 얘들이 나를 대하는 태도가 바뀌는 게 보였다. 나를 볼 때마다 내 눈치를 보고, 먼저 다가와서 인사하고. 뭔가 자세히 형용하긴 어렵지만 확실히 달라졌다. 근데 자꾸 내 눈치를 보는 모습이 미안하기도 하고, 부질없이 느껴지기도 해서 나는 금방 저 유치한 대응을 그만두고 말았다.
하지만 나는 하나를 배웠다. 쉽게 보이면 그들은 나를 쉽게 대한다는 것을. 이 일 말고도 두어 번 비슷한 일들이 있었다. 하지만 운 좋게도 미국에 온 지 6개월이 지난 지금까지 아직 심한 인종차별이나 무시 따위를 겪지는 않았다. 미국 사람들은 대부분 기본적으로 나이스하기 때문이다. 적어도 겉으로는.
하지만 생각하던대 나는 만만하게 보이기 딱 좋다. 아시아인이고, 내 성격이 워낙 '좋은 게 좋은 거'라서 헤헤 거리고 다니는 데다, 생긴 것도 희미하게 생겼다. 또 몸에 배어 있는 한국적인 예의까지 나름 이유는 충분하다.
그래서 어느 날 문득 무슨 바람이 들어 화장품 가게에 가서 새빨간색 립스틱을 구매했다. 태어나서 처음이었다. 이 정도 새빨간색 립스틱은. 한국에서는 너무 튀어서 평생 못 발랐을 색깔. 여기서는 거의 매일 바르고 다닌다. 심지어 마트에서 2명의 직원들에게 립스틱이 너무 예쁘다는 소리도 들었다. 미용의 용도로도 좋은 선택이었다.
뭐 어쨌든, 저 립스틱의 진짜 효과라 하면 내 내적 심리에 영향을 준다는 것. 새빨간색 립스틱 하나로 난 굉장히 '쎈' 언니가 된 느낌이다. 백인, 흑인 천지인 이곳에서 '나도 어디서 꿇리진 않어!' 하는 느낌으로 당당하게 다닐 수 있다는 것.
사실 어쩌면 이 모든 건 내 자격지심에서 비롯된 걸 수도 있다. 뭐랄까, 나름 한국에서 잘 먹고 잘 살다가 갑자기 건너 온 이곳에서, 갑자기 마이너리티가 되어 생긴 자격지심이랄까.
막상 남들은 별로 신경도 안 쓰는데 혼자 '만만하게 보이면 안돼!!!', '너무 쉽게 보이면 안돼!!!' 하며 스트레스 받다가 새빨간색 립스틱이라는 아이템을 장착한 뒤 많은 게 달라졌다. 그래도 여전히 내 성격은 똑같고, 아시아인 건 변함 없는데 말이다.
의도가 어찌됐든 나는 마음에 든다. 어쨌든 살아남아야 하는 이곳, '타지'라는 전쟁터에서 나를 지켜주는 든든한 창이자 방패를 구했다. 바로 새빨간색 립스틱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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