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 없는 날이었던 지난 20일, 동물보호단체 '케어'가 서울 세종대로에 부스를 열어 개·고양이 입양 캠페인을 하고 있다.
조세형
나는 개를 볼 때면 항상 죄책감을 느낀다. 그 이유는 무책임한 견주였던 과거의 내 모습이 떠오르기 때문이다.
1990년대 초반, 내가 살았던 서울의 주택가에는 매주 개장수가 동네를 돌아다녔다. 당시에는 도둑을 막기 위해 집집마다 마당에서 개를 길렀다. 우리 동네 개들은 일주일에 한 번 오는 개장수의 목소리를 기가 막히게 알아들었다. 평소에는 작은 소리에도 다함께 목청껏 짖어대던 개들이 "개 팔아요!"라는 개장수의 외침에는 쥐죽은 듯 조용했다. 개장수에게 팔려 가면 어떻게 되는지 아는 것 같았다.
우리 집에서도 하얀 스피츠 종의 개 한 마리를 길렀다. 비록 마당에서 길렀지만, '뚜뚜'라는 이름의 그 개는 내게 방범용이라기보다는 애완용에 가까웠다. 나는 뚜뚜를 꽤 예뻐했지만 좋은 주인은 아니었다. 뚜뚜가 개장수에게 팔려가는 것을 방관했기 때문이다. 당시 고3이었던 나는 입시 공부를 핑계로 개장수에게 팔려간 뚜뚜에 대해 별로 마음을 쓰지 않았다.
개장수에게 팔린 개들이 어디로 갈지는 뻔했다. 환경이 열악한 농장에 갇혀 있다가 잔혹하게 도축되어 고기가 됐을 것이다. 당시에는 기르던 개를 개장수에게 파는 사람들이 많았고, '반려동물'이라는 말은커녕 제대로 된 동물보호단체도 없었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어떤 변명을 늘어놓든, 뚜뚜에 대한 죄스러운 마음은 지울 수 없다.
오늘날에는 가정에서 기르는 개에 대한 인식이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달라졌다. '반려견'이라는 말이 '애완견'을 대체하고 있다. 개를 데려올 때는 펫샵에서 구입하기보다는 보호소에서 입양하는 것이 권장된다. 기르던 개를 잡아먹거나 개장수에게 넘기는 것은 (적어도 도시에서는) 상식적이지 않은 일로 여겨진다. 무엇보다 생명에 대한 책임감이 반려인의 필수조건으로 간주되는 세상이다.
"도축장으로 팔려간 서울대공원 사슴과 흑염소 살려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