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성 좌파' 선택한 영국 노동당 "다시 싸우자"

'비주류' 제러미 코니, 영국 노동당 당수 선거 '깜짝 승리'

등록 2015.09.14 08:46수정 2015.09.14 08: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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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러미 코니의 당수 선거 승리를 발표하는 영국 노동상 공식 페이스북 갈무리.
제러미 코니의 당수 선거 승리를 발표하는 영국 노동상 공식 페이스북 갈무리.영국 노동당

영국 노동당이 정권 탈환을 위해 '강성 좌파'를 선택했다.

영국 공영방송 BBC에 따르면 13일(한국시각) 발표된 노동당 당수 선거에서 제러미 코빈(66) 하원의원이 59.5%로 압도적인 득표를 거두며 승리했다. 90년대 노동당의 장기 집권을 이끌었던 토니 블레어 전 총리의 1994년 당수 선거 득표율 57%를 훨씬 웃도는 기록이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철저한 비주류였던 코빈의 승리를 예측한 사람은 드물었다. 그러나 코빈은 블레어가 당선된 1994년 이후 노동당 당수 선거에서 21년 만에 1차 투표에서 승리를 확정 지었다.

이번 선거는 영국 정계뿐만 아니라 전 세계의 주목을 받았다. 보수당에 연거푸 패하면서 외연 확대를 위해 중도의 길을 갈 것이냐, 진보의 색깔을 더욱 짙게 할 것이냐를 놓고 노동당이 갈림길에 섰기 때문이다. 노동당은 마르크스주의자를 자처하는 코빈에게 당권을 선사하며 전통 좌파로의 회귀를 선택했다.

코빈은 당수 수락 연설에서 "영국 국민들은 불의와 불평등에 지쳤고, 기존 정치와 미디어는 영국 젊은이들이 원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라며 "영국은 이제 변화해야 하며, 노동당은 다시 싸워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영국 노동당, '비주류 강성 좌파' 코니를 선택하다

코빈은 이번 선거에서 부자 증세, 긴축 반대, 철도·가스산업 재국유화, 대학 수업료 면제, 영국 핵무기 폐기 등 파격적인 공약을 내걸며 논란의 중심으로 떠올랐다. 그가 '영국의 시리자(그리스의 급진좌파 정권)'로 불리는 까닭이다.


엔지니어 아버지와 수학 교사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코빈은 노스런던공과대를 중퇴하고 노동당에 가입했다. 전국 단위 노조의 상근직을 거쳐 1983년 런던 북부 선거구 하원의원으로 당선되면서 의회에 입성한 그는 32년간 한 지역구에서만 7선 의원으로 활동하며 노동당의 대표적인 강성 좌파로 활약했다.

코빈의 검소한 생활은 영국에서 유명하다. 자가용을 소유한 적이 없는 그는 걷거나 자전거를 타고 출퇴근한다. 덥수룩하게 기른 흰 수염과 타이를 매지 않은 소탈한 옷차림은 코빈의 상징이 되었다.


코빈은 1980년대 마거릿 대처의 보수당 정권과 과격하게 대립했고, 노동당을 중도 노선의 '제3의 길'로 이끌었던 블레어 정권도 줄곧 비판해왔다. 원내 투표에서 500여 차례나 당 노선과 어긋나는 투표를 한 것은 그의 강한 '반골 기질'을 잘 보여준다. 1984년 영국 주재 남아공 대사관 앞에서 인종차별 반대 시위를 벌이다가 경찰에 체포되기도 했다.

좌편향 공약의 에드 밀리밴드 당수를 앞세워 지난 5월 총선에 나선 노동당은 보수당에 참패를 당하면서 과반 의석을 허용했다. 그러자 영국 언론은 노동당이 중도 성향의 당수를 선택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하지만 노동당이 더욱 좌편향적인 코빈을 선택하자 원인 분석과 전망이 한창이다.

BBC는 "노동당 전체가 역사적인 노선 투쟁에 휘말릴 것"이라며 "영국뿐 아니라 전 세계 진보 정치에 큰 변화를 몰고 올 것으로 예상된다"라고 분석했다. <가디언>은 "코빈이 믿기 어려운 승리를 거뒀다"며 "이는 곧 블레어 정권이 내세웠던 '제3의 길'의 폐기를 의미한다"라고 평가했다.

노동당 내분... 당권 잡자마자 검증대 오른 코니

 제러미 코니의 영국 노동당 당수 선거 승리를 보도하는 영국 일간지 <인디펜던트> 표지 갈무리.
제러미 코니의 영국 노동당 당수 선거 승리를 보도하는 영국 일간지 <인디펜던트> 표지 갈무리.인디펜던트

그러나 코빈은 당권을 거머쥐자 곧바로 거대한 도전에 직면했다. 노동당 내 중도 노선을 지향하는 세력이 강하게 반발하며 분열 조짐까지 보이고 있는 것이다. <텔레그래프>에 따르면 블레어 전 총리는 "코빈이 당수가 되면 노동당은 절멸할 것"이라고 비난했고, 잭 스트로 전 외무장관은 "노동당이 최악의 선택을 했다"라고 깎아내렸다.

당장 코빈의 그림자 내각(노동당이 총선에서 승리해 정권을 잡았을 때를 대비한 예비 내각)에 들어가지 않겠다고 선언한 의원이 10여 명에 달하고, 코빈 체제에서 당직을 맡을 수 없다며 사임하겠다는 당원들이 속출하고 있다.

<인디펜던트>는 "코빈의 압도적인 승리가 오히려 노동당의 분열을 일으키고 있다"라며 "코빈은 보수당과 싸우기 보다 노동당의 찢어진 상처를 꿰메는 데 더 많은 시간을 보낼 수도 있다"라고 지적했다.

코빈은 먼저 손을 내밀었다. 그는 "누구나 그림자 내각에 들어올 자격이 있다"라며 "총선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당의 모든 힘이 협력해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또한 "논란을 불러올 정책을 내세우지 않을 것"이라고 덧붙이기도 했다.

보수당은 기대와 우려가 교차하고 있다. <가디언>은 "보수당 일각에서는 좌편향적이고 노동당도 규합하지 못하는 코빈이 쉬운 상대라고 안심하고 있지만, 55만 명이 노조 당원과 일반 유권자들의 지지를 동시에 얻은 코빈은 무시할 수 없는 상대라는 의견이 엇갈리고 있다"고 전했다.

<파이낸셜타임스>에 따르면 데이비드 캐머런 총리는 보수당 의원들에게 "코빈의 당선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말라"고 당부했다. 반면 보수당의 차기 당수로 떠오르는 오지 오스본 의원은 "코빈의 노동당에 맞서 보수당도 진정한 노동자를 위한 당으로 거듭나 중도 노선으로 가야 한다"라며 경계심을 드러냈다.

미국 언론도 코빈의 노동당 당수 등극을 최근 민주당에서 힐러리 클린턴 전 국무장관을 바짝 추격하고 있는 '민주적 사회주의자' 버니 샌더스 상원의원의 돌풍과 연결하며 전 세계 진보 정치의 중요한 도전이 될 것으로 주목하고 있다.
#제러미 코니 #영국 노동당 #좌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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