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세상에 '좋은 중독'은 없다

[소설] 우리에게 일어날 수 있는 비극 'Another Holocaust' 8화

등록 2015.09.13 17:27수정 2015.09.13 1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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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화에서 이어집니다)

K의 일상이 바빠졌다. 한 달 동안 재일 한국인 직원 김윤아의 도움을 받아 '한국문화라운지'라는 인터넷 커뮤니티를 개설했기 때문이다. 회원도 얼추 200여명 모았고, 본격적으로 커뮤니티를 운영하면서부터 분주해지기 시작했다. 서울 본사 홍보팀, CSR팀과 연락해 관련 콘텐츠도 꽤 구색을 갖추게 됐다. 김윤아가 '시삽'으로 등록했고, K는 '부시삽'이면서 한국 문화에 대한 회원들의 질문에 답하는 동시에 한국의 영화, 음악, 소설 등 문화 전반에 대해 소개하는 일을 도맡았다.


여기 저기 김윤아가 대학 때부터 잘 아는 파워 블로거들에게 커뮤니티 오픈과 참여를 안내하는 이메일과, 가능할 경우 전화로 도움을 요청하기도 했다. 크게 주효했다. 입소문이 퍼지면서 도쿄 일원에서 나이에 관계없이 먼저 여성들을 중심으로 회원들이 몰려들게 된 것이다. K의 짧은 일본어는 김윤아의 도움을 받으면서 큰 어려움 없이 커뮤니티를 운영할 수 있었다.

회원들의 요청이 많아져 '오프라인 정모'가 열렸다. 장맛비가 세차게 오는 금요일 저녁 시간이었음에도 쇼쿠안도리에 있는 한국 식당 '엄마 손'에는 130명 가까이 모였다. 미리 예약을 받은 것보다 온 사람이 더 많아 그리 크지 않은 공간이 더욱 비좁아 보일 정도였다. 한국에서도 인터넷커뮤니티의 첫 정모에는 사람이 많이 오는 편이라 해도 이처럼 '열의'를 보이지는 않는다.

특히 남녀 만남을 주선하는 모임이라든지, 아니면 취업을 준비하는 그런 절박한 모임도 아닌, 한국 문화에 관심을 갖는, 그냥 생각이 비슷한 사람들이 모이는 커뮤니티 정모로서는 대단한 성황이다. 여성만 있으면 어떡하나 했던 고민도 쓸 데 없었다. 남성이 1/3을 넘어 거의 절반에 가까워 보인다.

예상보다 많은 회원들이 한꺼번에 모여들어 조금은 혼잡스럽다. 운영진은 정모 진행을 원활히 하기 위해 일단 회원들을 지역별 6개 소모임으로 나눴다. 그리고 각 소모임별로 대표를 뽑았다. 각 지역의 대표들과 구성원, 운영진들의 의례적인 인사가 끝났다. 불고기와 김치나베, 파전 등 주문한 음식이 식탁 앞에 놓이고 식사가 시작되자 좀 조용해졌다. 첫 모임이니만큼 서로 모르는 사이고, 밥 먹을 때 왁자지껄한 편인 한국 사람들보다는 원래 조용하게 밥을 먹는 일본인들의 습성 때문인 것 같다.

K는 어느새 자신이 영업사원이 된 기분이다. 부시삽이지만 실질적으로 커뮤니티를 이끌어가야 하는 해설사 겸 커뮤니티를 크게 만드는 '확장 책임자'의 역할을 맡아서다. 그는 A그룹의 지원 하에 커뮤니티가 이뤄졌다는 사실은 숨겼다. 찜찜하기는 했다. 하지만 기자 시절 '취재원 보호' 만큼이나 지금은 스폰서를 알리지 않아야 하는 것이 A그룹에서 요구하는 주요 조건이고, 구태여 알릴 이유도 없었다.


전직 기자로서 작가 겸 칼럼니스트라는 타이틀을 적어 넣은, 알록달록한 명함을 각 지역별 대표들과 회원들에게 뿌렸다. 커뮤니티를 통해 한국에 대해 이해를 높이고, 회원들과 친목이 돈독해지기를 바란다는 김윤아를 통한 흔한 인사치레와 함께였다.

즐거운 분위기의 1차 모임이 얼추 정리됐다. 지하철이나 철도의 시간표에 따라 도쿄 근교, 먼 곳에서 온 사람들은 미리 자리를 떠났다. 하지만 사람이 모이는 곳, 어디서나 비슷하게 끝까지 헤어짐을 아쉬워하는 사람들은 있기 마련이다. 대체로 그들은 술을 매개로 늦게까지 이야기를 나눈다. 정모가 끝나자 뜻밖에도 한 중년 부부가 2차 자리를 주선한다.


'cozy'라는 이름 그대로 아늑한 바에 함께 한 사람은 K와 김윤아, 부부를 포함해 모두 6명이다. 서울의 여느 카페처럼 대체로 팝이나 재즈가 흘러 나와 친한 사람들과 마음 놓고 어울릴 수 있는, 처음 와 보지만 친숙하게 느껴지는 넉넉한 공간이다.

소규모로 무역업을 하는 가네모토 신지-에리코 중년 부부와 중학교 사회과 여교사인 독신녀 야마모토 리에, 취업을 앞둔 젊은이 다카야마 유카타... 다시 한 번 쑥스러운 자기소개가 이어졌고, 기호대로 주문한 맥주나 위스키, 술을 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음료수가 놓여진다.

"젊었을 때, 조용필의 '돌아와요 부산항에'를 들은 게 한국 문화와의 첫 만남이었습니다."
가장 나이가 지긋한 가네모토 신지가 옛 얘기를 시작했다.

"배용준과 최지우가 출연한 '겨울의 소나타'를 보고 눈물을 꽤나 많이 흘렸습니다. 너무 스토리도 아름답고, 영상도 좋았어요. 그러면서 한국 드라마와 영화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됐고요. 고 2인 딸과 함께 드라마를 통해 한국말도 배우고 있는 중인데, 발음이 어렵습니다."

그의 아내 에리코도 스스럼없이 거들었다. 어찌 보면 우리나라 대중문화가 일본에서 사랑을 받게 된 결정적 계기가 이 두 사람의 개인적 경험과 그 맥락을 함께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중학교 때 '카라'라는 걸 그룹의 '열혈 팬'이 됐습니다. 그 이후 한국 음악은 물론 음식, 패션에 대해서도 호기심 뿐 아니라 직접 경험해 보기도 할 정도고요."

젊은이다운 유쾌한 반응이다. 유카타는 할아버지가 한국인 출신 광부라는 말도 거리낌 없이 덧붙인다. 후쿠오카에서 태어난 그는 할아버지가 일본에 일하러 왔다가 눌러 살게 됐다는 얘기만 알 뿐 전 총리였던 아소 다로 집안의 '아소탄광'에 강제징용으로 끌려왔던 사실은 역시 모른다.

"사실 어릴 적부터 한국에 대해 이웃 나라라는 사실 이외에 전혀 몰랐어요.  대학교 때 최양일 감독의 영화 '피와 뼈'를 보고 충격을 받았어요. 왜 한국인들이 일본에 와서 저렇게 처절하게 살았을까 하는. 그때부터 한국과 한국인을 비롯 '자이니치'에 대해 공부했고, 알면 알수록 더 궁금해지는 게 많았고요.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설명이 필요한 부분도 그만큼 늘어났고요."

사회과 선생의 문제 의식을 리에에게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최양일 감독은 '자이니치(在日)'로 평생을 살아온 현역 일본 감독이다. 조총련계로 조선인학교를 다녔지만 1994년 북한 국적을 포기하고 한국 국적을 취득했다. 아직 귀화하지 않았음에도 일본감독협회장을 지낸 독특한 이력을 가진, 자이니치의 비극과 희극을 몸으로 부딪치며 살아온 사람이다.

2004년 영화 '피와 뼈'에서 그는 이름난 배우, 감독이자 코미디언인 기타노 다케시를 내세웠다. '김준평'이라는 원초적이고 마초적인 주인공에 딱 맞는 선택이었다. 소외된 인간 내면에 숨어 있는 인간의 폭력성, 걸러지지 않은 욕망과 마성을 무서울 정도로 세세하고, 직설적으로 묘사해 호평을 받았다. '자이니치'라는 특수인이 처한 환경이 아닌 한 인간의 내면과 인생을 밀도 있게 표현했기 때문이다. 자못 무거운 얘기에 한 순간 가라앉은 분위기는 김윤아의 재치에 의해 다시 밝아진다.

"한국에서도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가 인기가 많다던데, 요즘도 그런가요?"
K는 잠시 생각을 하다가 답한다. 개인적인 견해라는 점을 전제한다.

"대체적으로 인기가 높습니다. 남성보다 여성들이 훨씬 좋아하고요. 감각적인 문체 뿐 아니라 감성적인 표현 때문입니다. 1989년 출간한, 원 제목으로는 '노르웨이의 숲'인 '상실의 시대'부터 그의 시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요즘도 매년 몇 권씩 여러 출판사에서 무라카미의 작품이 나오고 있고요. 신간이 나올 때마다 출판사들이 앞다퉈 판권을 사들이려 해서 출판계의 문제가 된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죠.

재미있는 얘기로는 무라카미의 작품 '1Q84'가 발표된 다음 인기가 치솟자 '식자(識者)입네'하는 허영으로 읽어보지도 않고 읽었다고 거짓말을 하는 사람이 늘었습니다. 특히 그 제목을 'IQ84'라고 잘못 말하는 사람이 부지기수였고요. 개인적으로 좋아하지만, 열광적으로 좋아하는 것은 아닙니다…."

사실 K는 무라카미 하루키를 질투하고 있다. 특히 그의 자유로운 영혼과 상상력에 대해. K의 말에 커뮤니티 회원들이 재미있어 하며, 적극 공감한다. '문화'에 관심을 가진 회원들이기 때문인지 대중문화는 물론 문학에 관해서도 서로의 것에 대한 감정이입의 능력과 같은 인간으로서 함께 느끼는 힘이 그만큼 큰 것이다. 이야기와 술에 자정이 훨씬 넘은 주말 밤은 짧았다. 오전 2시가 다 돼서야 다음을 기약하고 헤어진다.

김윤아를 집에 데려다 주고, K가 숙소로 온 시간은 이미 오전 3시를 넘었다. 도쿄의 끈적거림을 샤워로 씻어낸다. 아직 술기운은 가시지 않는다. 목마르다. 냉장고에서 차가운 맥주를 꺼내 들이킨다. 참으로 시원하다. 그러면서 생각한다. 이렇게 시원하게 마신 맥주 때문에 다음날 또 다른 갈증을 느낀다? 자신 역시 술에 대한 시시포스라는 점을 인정한다. 만날은 아니지만 술을 취할 때까지 마시고, 숙취에 시달리다 깨고, 그러다가 다시 마시고….

요즘은 그 증상이 거의 없어진 상태다. 하지만 아직 K 역시 알코올 중독자라는 점은 변함없다. 다만 술의 해악에 대해 스스로 받아들이고 책임진다며 자위하는 중독자다. 그는 변명한다.

"늘 취해 있는 것은 전혀 아니다. 날을 잡는 술꾼이다. 그러나 미리 날을 정하지는 않는다. 술을 마시다가 동하면, 술에 못이기는 일행과 헤어진 다음 혼자 마신다. 수년 전부터 유행했던 '혼술(혼자 술마시는 것)' 그 자체다. 술집이든 집이든 관계없다. 일종의 '히키코모리형(型)' 알코올 중독자다. 그러다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냈다. 미련 없는 직장도 몇 번 그만뒀다. 그게 나의 책임지는 방식이다. 그런데도 개인의 삶은 변하지 않는다. 그래서 알코올 중독인 것이다."

정규직과 거리를 둔 다음엔 의사(擬死)체험도 간혹 한다. 몇 날 며칠 술을 마신다. 의식이 있을 리 없다. 인사불성은 때로 몸에 알 수 없는 상처를 남긴다. 취기가 가시기 전 빈속에 마신 술은 다시 술을 부른다. 사탕이나 초콜릿, 아니면 아이스크림이 호사스러운 안주다. 한계치에 이르면 몸에서 제동한다.

"더 이상 술을 마시면 죽는다는 신호다. 그제서야 지쳐 잠이 든다. 졸졸 흐르는 시냇물처럼 얕은 잠이다. 꿈을 꾼다. 꿈이 현실이 아닌 것은 분명하다. 그러면 술에 취해 잠들어 꾸는 꿈은 무엇인가. 의식 또한 가늠할 수 없다. 그런 몽환 속에서 꾸는 꿈은 또 다른 환영인가. 모르겠다. 여러 편의 헛것을 본 다음 깊은 바다, 심연으로 가라앉는다."

그리스 신화에서 '스틱스(Styx)'라고 불리는 강을 건널 찰나, 황천(黃泉)에 가까이 다가갔다가 되돌아 나오는 몸부림이 이어진다. 잠은 더럽디 더럽고, 괴롭디 괴로운 숙취 때문에 깬다. 살고자 하는 고통만 남는다. 머리는 무거운 데다 시끄럽다. 뇌라는 세포 덩어리는 졸지에 꽹과리가 된다. 숙취라는 꽹과리채는 사정없이 해골을 통해 뇌 자체는 물론 뇌수까지 출렁이도록 때린다. 그게 살아있다는 증거다.

이내 견딜 수 없는 갈증에 목은 타오른다. 물을 찾는다. 냉장고에 머리를 처박는다. 차디찬 생수를 물병채로 목젖이 떠내려가라며 들이붓는다. 시원하다는 느낌은 잠시다. 다시 물을 마신다. 마셔댄 물이 온몸에 퍼진다. 몸은 술과 물을 먹은 솜이다.

어지럽다. 이젠 구토다. 온몸으로 퍼진 술독을 씻어낸 물이다. 게워낸다. 체액도 함께 빠져나간다. 물 혹은 음료수를 마시고 토해내는 의식이 반복된다. 이제 쓸개액 섞인 물, 그러니까 암녹색을 띤 물까지 짜낸다. 뱃살에 쥐가 날 정도다. 지치기도 지친 상태다. 결국 화장실에 갈 힘도 없다. 이젠 쓰레기통이 살아남기 위해 통과하는 아웃렛이 된다. 막판 토악질에 온 몸은 완전 방전이다. 폭풍우가 지났다. 한참을 쓰러져 조용히 잔바람을 삭인다. 아직 머리는 우지끈댄다. 메슥거림도 완전히 가신 것은 아니다.

그렇게 혼미하다가 겨우 정신을 차린다. 아직 숙취의 그늘을 벗어난 게 아니다. 다음 절차가 남아 있다. 녹차를 대충 우려낸다. 평소 같으면 정성스레 내린 뜨거운 차를 한 모금씩 음미하며 마신다. 그러나 술에 절어 있을 때는 커다란 유리병에 하나 가득 차를 만들어 우선 냉동실에 넣어 놓는다. 식을 때를 기다려 다시 병째로 들이킨다. 겨우 속이 좀 편안하다. 그리고 다시 갈증을 느끼면서 물을 마신다. 그때 진정한 피곤이 몰려온다. 몸과 마음이 평온해지면서 죽음만큼 깊은 잠에 빠진다.

갈증은 아직 풀리지 않았다. 목 마르면 일어나 물 마시고 다시 쓰러진다. 죽음의 문턱에서 진정으로 완연히 되돌아온다. 마셔댄 물 탓인지 요의를 느낀다. 입으로가 아닌 아랫도리로 정상적인 노폐물을 찔끔 쏟아낸다. 살얼음이 얼 정도로 차가워진 녹차가 이젠 정말 맛있다. 환생의 기쁨이다. '후욱'하고 깊게 한숨을 쉰다. 자신의 숨결에는 아직 알코올 잔향이 남아 있어도 살아났다는 신호를 몸이 보낸다. 며칠 동안 술 이외에 아무 것도 먹지 못한 배고픔이 야금야금 쳐들어온다. 라면이라도 끓여먹어야겠다. 그렇게 다시 무서운 일상은 시작된다.

자신이 알코올 중독자라는 사실을 새삼스레 되새긴 K는, 문득 서울을 떠나오기 전 알코올중독자 모임에서 봤던 불행한 남자 생각이 난다. 이메일로 로사 수녀에게 그의 근황을 묻는다. 어쩌면 어쩔 수 없는 동류의식에서다. '좋은 중독'은 없을까.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중독(中毒)'이라는 단어를 사전에서 새삼스럽게 찾아본다. '생체가 음식물이나 약물의 독성에 의하여 기능 장애를 일으키는 일', '술이나 마약 따위를 지나치게 복용한 결과, 그것 없이는 견디지 못하는 병적 상태', '어떤 사상이나 사물에 젖어 버려 정상적으로 사물을 판단할 수 없는 상태'를 뜻한단다.

'병적', '비정상'이라는 게 중독의 요체다. 그래서 중독에서 벗어나기는 쉽지 않다. 그리고 결국 좋은 중독은 없다는 얘기다. 그나마 K는 현재 외국에 나와 있고, 나름의 계약에 의해 일하고 있기 때문에 술에 대한 중독에서 조금 거리를 둘 수가 있을 뿐이라는 점 또한 K도 잘 인식하고 있다.

몇 년 전 자살한 미국 영화배우 로빈 윌리엄스가 떠오른다. 전 세계 사람들에게 웃음을 주고, 상처 받은 마음을 어루만졌던 큰 배우였다. 오래된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에서는 세속주의에 방황하는 학생들의 입시 공포와 자아 상실에 대해 맞서 싸우라며, 라틴어로 "Carpe Diem!(오늘 최선을 다하라!)", 영어로 "Seize the day!"를 외쳤던 그였다.

영화 '피셔 킹'에서는 아내의 죽음을 당하고 정신 줄을 놓고는 '성배(聖杯)'를 좇는 전직 역사학 교수로, 아내를 죽게 만든 '간접적 동기 유발자'를 용서하는 역할이었다. 유작이 돼 버린 영화 '앵그리스트 맨'에서는 조울증 환자로서 아들과 이혼한 아내와 화해를 위해 애쓰는 모습을 보이며, 사람들에게 가족의 소중함을 일깨웠다. 그처럼 희망과 용서, 화해라는 인간 공통의 가치를 위해 신들린 연기를 보여준 그였다.

그랬던 그는 젊은 날의 알코올중독을, 우울증을 극복한 것으로 여겨진 사람이었다. 하지만 입에 다시 술을 대기 시작했고, 결국은 생애를 자살로 마감했다. K는 그놈의 '중독'을 못 이기고 로빈 윌리엄스처럼 돌이킬 수 없는 길에 접어드는 것을 가장 두려워한다. 그러나 그런 무수한 죽음을 깨어있는 상태에서 또렷이 의식하면서 또 다른 무의식, 중독에 빠져드는 게 바로 K라는 사실은 차갑기만 하다. 그래도 오늘을 속아 살았듯 내일도 속아 살아갈 것은 분명하다고 K는 확신한다.    

생각이 많아진 주말 새벽, 의무사항은 아니지만 일주일에 한 번씩 김형기 실장에게 내는, 일종의 보고서를 마저 정리해 보낸다. 나름대로 성황을 이룬 첫 정모에 대해 성과를 부풀린 내용이다. 보고서를 마치고, K의 습관은 다시 뉴스를 뒤적인다. 이 모든 게 '기자 나부랭이'라는 직업을 가졌던 '뉴스중독'의 후유증이라고 생각하니 쓴 웃음이 나온다.

어렴풋이 날은 다시 밝는다. 주말이 좋은 것은 대체로 공식적인 출근을 안 해도 된다는 점, 그래서 자신의 시간을 자신을 위해 쓸 수 있다는 점일 것이다. 뚜렷하게 출근 시간도 없고, 업무량이나 업무범위 또한 자신의 재량에 따라 달라지는 K에게도 그렇다. 하물며 죽어라고 일하고, 언제 어떻게 잘려나갈지도 모른다는 공포에 치여 사는 일반 월급쟁이들에게 주말은 얼마나 소중한 시간인가.

다음 주 새로운 월요일이 시작될 때까지 마치 죽음을 앞둔 이들의 '잔존 예상 생존 기간'이나 다름없을 것이다. 첫 정모를 앞두고 긴장했던 마음과 몸이 무너지듯 덮친다. 게으른 계약직 K는 주말의 늦잠을 잘 요량이다.
#무라카미 하루키 #로빈 윌리엄스 #알코올중독 #1Q84 #최양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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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 Bella Vita! 인생은 아름답다며, 글쓰기로 먹고 살기 위해 애쓰는 여러분의 이웃입니다. 세계일보, 머니투데이, 한경비즈니스, 이코노미조선 등에서 기자로 일했습니다. 2019년 '아산문학' 공모전에서 '그는 제바닷타였을까'라는 단편소설로 대상을 받고, 전업작가로 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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