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가협에서 아들 영정을 바라보는 아버지창신동 유가협 사무실에서 아들 허원근 일병의 영정을 바라보는 아버지.
고상만
그 날, 법정에는 많은 사람이 숨을 죽이고 있었다. 허 일병의 아버지 역시 재판정의 제일 앞자리에서 가만히 눈을 감고 있었다. 잠시 후 서울 고등법원 민사 합의 9부 재판장이 법정에 들어섰다. 그리고 내려진 선고. 설마 했던 우려는 사실이 되었다. '타살'로 인정됐던 1심 선고는 항소심에서 '자살'로 뒤집혔다.
1984년 당시 7사단 헌병대가 자살로 발표한 후 허 일병의 죽음은 모두 4번 자·타살을 오갔다. 그런데 이 날 다시 허 일병은 1심 '타살'에서 다시 '자살'로 원 위치했다. 돌고 돌아 다시 제자리로 돌아온 것이다.
그러면서 자살로 결론을 내린 민사 2심 재판부의 판단은 1984년 7사단 헌병대의 수사 결과를 '사실상' 그대로 반복했다. 더 밝혀진 것도 없었고 새로울 것도 없는 31년 전, 바로 그 '자살론' 그대로였다.
먼저 "3발의 총상이 가능한가"에 대한 의문에 대해 재판부는 "망인과 신체 조건이 비슷한 사람이 M16 소총의 발사 자세를 취하는 데 큰 어려움이 없었다"고 했다. '자세가 가능하니 자살이 맞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이를 비슷한 체격의 남자가 시연하는 모습을 슬라이드로 보여주기도 했다.
하지만 시연자는 총기로 좌우 측과 이마에 총구를 가져다 대기만 할 뿐이었다. 진짜로 좌, 우 가슴에 총상을 입고도 그런 상태에서 이마에 또 총을 쏠 수 있는지는 시연이 불가능한 상상이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이미 2번의 총상으로 가슴과 앞뒤로 4개의 큰 구멍이 생겼을 허 일병. 이 때문에 가슴뼈도 부러진 상태에서 재차 이마를 향해 또 총을 쏜다는 것이 가능하다며 자살이라는 재판부의 결론은, 어쩌면 신비하기까지 했다.
이는 허 일병이 사망하고 이틀 후인 1984년 4월 4일 허 일병을 부검한 부검의의 의견과도 배치하는 판단이었다. 당시 박아무개 부검의는 2002년 국방부 특조단 조사에서 "허원근 일병의 죽음은 자살한 것으로 볼 수 없다"라고 진술한 바 있다.
그는 그러한 증거로 크게 3가지를 제시했다. 첫째는 허 일병의 좌우 가슴에 난 총상이 발생한 시간대가 크게 다르다는 판단이었다. 부검의는 허 일병의 우측 가슴에 먼저 총상이 났고, 그로부터 수 시간이 지난 후 좌측에 총상을 입은 것이라고 진술했다. 정상적인 자살이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는 의문사위의 조사 결과와 부합한다.
두 번째는 허 일병이 좌우 가슴을 쏘고 스스로 이마를 향해 세 번째 총을 쏠 수 있냐는 상식이었다. 부검의는 좌우 가슴에 각각 한 발씩 총을 맞았다면 이미 폐가 손상돼 숨도 쉴 수 없고 또 과다 출혈로 사망할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했다. 그런 상황에서 다시 우측 이마 부위에 한 발을 더 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진술했다.
이러한 타살 증거는 너무 많아 일일이 열거하기가 어려운 데 마지막으로 하나는 "현장 주변에 혈흔이 거의 없다면 그것은 상식적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부분이다"라는 부검의의 진술이었다. 그러면서 부검의는 "적어도 자살은 아닌 것으로 생각된다"며 국방부 특조단에서 진술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진술에도 국방부 특조단은 허 일병을 자살로 발표했다. 마찬가지로 민사소송 항소심 재판부 역시 국방부 특조단과 전혀 다르지 않은 결론으로 "허 일병은 자살했다"고 결론 내린 것이다.
그런데 나를 더욱 경악게 한 것은 민사소송 1심 재판부가 허 일병의 사인을 타살로 판단하는 데 중요하게 본 '뇌 조직 물질'에 대한 판단이다. 항소심 재판부가 이 사건을 자살로 처리하고 싶어도 도저히 할 수 없는 결정적 한계가 나는 이 사라진 뇌 조직 물질이라고 확신한 것이다.
다른 것은 몰라도 사건 현장에서 보이지 않는 이 뇌 조직 물질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적어도 '이 나라, 대한민국이 민주적이고 합리적인 국가라면, 또 합리적인 상식을 가진 재판부라면 무엇으로 이 의혹을 피해 갈 수 있겠나'하는 믿음이었다.
하지만 결론은 어처구니 없었다. 놀랍게도 그들의 해결 방안은 지극히 간결했다. 항소심 재판부는 사건 현장에 피가 보이지 않은 것에 대해 땅에 스며들었다는 군 헌병대 조사 결과가 옹색하다 여겼는지 더 황당한 논리를 가져왔다.
그것은 "M16 소총의 회전력으로 혈액이 비산(날아서 흩어짐)하여 날아갔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보이지 않는 뇌 조직 역시 "그렇게 어디론가 날아간 것으로 판단된다"였다. 재판부는 그렇게 모든 의혹을 한꺼번에 해결해 버린 후 "자살이 맞다"며 유족에게 원고 패소 판결을 내렸다.
정말 그 판결을 들으며 실소하지 않을 수 없었다. 총의 위력이 보잘것 없어 무려 3번이나 총을 쏴야 사망할 정도였다면서 반면 피와 뇌 조직 물질은 그 총의 회전력으로 전부 흩어져 어디론가 사라졌다는 이중적 논리는 너무도 뻔뻔하고, 뻔뻔하며, 또 뻔뻔한 주장이 아닐 수 없었다.
이런 판결에 대해 허 일병의 유족이 반발하는 것은 당연했다. 아버지 허영춘씨는 "국방부가 그동안 해 온 아들의 자살 주장을 항소심 판사가 그대로 말하더라"며 "말할 수 없이 참담하다"는 한 마디를 남긴 채 법정을 떠났다.
비겁하고, 어처구니없는 대법원 판결그 항소심이 끝나고 약 2년 1개월이 지나간 2015년 9월 10일. 마침내 허원근 일병 사건의 진실을 마지막으로 확인하는 대법원 판결이 다가왔다. 하지만 모두가 간절히 기도하던 순간은 그야말로 허탈하게 끝났다.
대법원의 판결은 민사 항소심 판결보다 더 끔찍했다. 결론은 "나도 잘 모르겠다"였다. 허 일병이 자살한 것인지, 아니면 타살인지 우리도 잘 모르겠으나 다만 항소심이 내린 "군 수사기관의 부실한 조사로 손해배상 책임을 인정한 원심은 정당하다"는 황당한 판결이었다.
너무나 비겁하고, 또 너무나 어처구니없는 판결이 아닐 수 없었다. 허 일병이 자살했는지, 아니면 타살된 것인지를 판단할 수 없다면서 반면 '자살을 인정한 항소심의 군 수사 기관 부실 조사만 인정'하는 교묘한 수법으로 대법관들은 자신들에게 쏟아질 비난 책임을 모면하려 했다.
이러한 대법원 판결이 내려진 그날, 허 일병의 아버지의 낙심은 뭐라고 설명할 수 없다. 31년 전 그때, 아버지는 장남이었던 허원근 일병을 집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허 일병이 사망한 4월 2일 다음날은 바로 허 일병의 첫 정기 휴가일이었다.
1983년 9월 28일, 아버지는 군에 입대하는 아들 허원근을 전남 진도항에서 마지막으로 봤다. 일이 바빠 같이 갈 수 없었던 아버지는 혼자 배를 타고 나가며 아버지를 향해 손을 흔들던 아들을 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정기 휴가를 받고 돌아올 아들과 다시 만날 날을 기다리고 있을 때였다.
그 시각, 아들 허원근 역시 바빴다. 이제 다음날이면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여동생을 만나러 나가는 첫 정기 휴가를 앞두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허 일병은 첫 휴가에 입고 나갈 휴가복을 빨아 놓았다고 한다. 멋지게 다려 입고 나갈 A급 군복이었다. 이어 허 일병은 소대장에게 휴가를 나가면 대신 집에 안부를 전해주겠다는 약속도 했다고 한다.
그런 허원근 일병이 첫 정기 휴가를 바로 하루 앞둔 그날, 자살했다는 것이다. 그것도 자신의 몸에 무려 3번이나 총을 쏘아가며 모질게 목숨을 끊었다는 것이다. 유서도 없었다. 휴가때 입고 나가고자 빨아 놓은 휴가복만 남긴 채 그렇게 자살했다는 것이다. 이것이 당시 7사단 군 헌병대의 수사 결론이었다.
그날부터 아버지는 무려 만 31년을 싸웠다. 서울 여의도 거리에서 잠을 잔 것만 따져도 몇 년은 족히 될 험난하고 고된 싸움이었다. 누구처럼 민주화 운동으로 분신 자살을 한 것도 아니기에, 군에서 의문사로 죽었다는 것을 누가 인정도 해주지 않는 세상에서 아버지는 하루 하루 늙어가며 아들의 진실을 밝히기 위해 죽도록 고생했다.
그 과정에서 아버지는 끝내 암을 얻었다. 하지만 암 수술을 받고 거동할 수 있게 되자 제일 먼저 한 일은 또 아들의 명예 회복을 위한 투쟁이었다. 거리에서 또 잠을 자고, 새벽녘에 국회 앞에서 피켓을 들고 서 있었다. 그런 아버지를 다시 죽인 재판, 바로 대한민국 대법원의 이번 판결이다.
"왜 죽었는지 모르겠다"고 하면서 판결을 내리는 대법원의 결정에 아버지의 심경은 설명할 길이 없다. 1983년 9월 28일 군에 입대한 날부터 지금까지 아버지는 아들을, 또 아들은 아버지를 단 한번도 만나지 못했다. 그때 마흔다섯 살이었던 아버지는 올해 일흔여섯 살의 노인이 되었다.
그 아버지는 이제 힘이 없다. 암 수술을 받은 일흔여섯 살의 나이로 또 어떻게 싸워야 할까. 이 아버지의 억울함을 누가 풀어줄 것인가. 비통함이 하늘에 닿는 그 날, 바로 대법원이 판결로서 허원근 일병을 다시 죽인 2015년 9월 10일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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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 운동가, 재야인사 장준하 선생 의문사 및 친일 반민족행위자의 재산을 조사하는 조사관 역임, 98년 판문점 김훈 중위 의문사 등 군 사망자의 명예회복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저서- 중정이 기록한 장준하(오마이북), 장준하, 묻지 못한 진실(돌베개), 다시 사람이다(책담) 외 다수. 오마이뉴스 '올해의 뉴스게릴라' 등 다수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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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잘 모르겠다'는 대법원, 항소심보다 더 끔찍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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