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맛만화>는 찌질한 그림체의 주인공이 잠에서 깬 모습으로 급 태세전환을 하며, "아 시발 꿈"하고 끝난다.
하지율
이는 이상과 현실의 괴리를 모순적으로 부각시켜, 인간의 이상이란 부질없다는 짙은 냉소를 드러낸다. 이상에 대한 냉소는 최근에는 청년, 그리고 국가 전반으로까지 확대됐고 요즘 유행하는 "한국은 헬조선(지옥+조선)과 다름없다"는 인식에서도 발견된다.
최근 <경향신문>과 아르스 프락시아가, 비교적 진보성향의 SNS인 트위터와 보수성향 커뮤니티인 일베의 헬조선 담론 데이터를 의미망으로 시각화해 공동분석한 자료에 따르면 한국은 더 이상 사회로 제 기능을 못 한다는 '절망'이 관측됐다. (관련 기사:
헬조선에 태어나 노오력이 필요해)
또 '노력'해도 현실을 해결할 수 없다는 짙은 회의와 그 원인을 '미개'한 사회 풍조에서 찾는 경향도 두드러졌다. 다만 그 풍조의 책임을 트위터는 사회 '구조 탓'에서 찾는 경향이 높지만, 일베는 '개인탓'이 섞여 있었다. 무엇보다도 고통을 '누구나 겪는 것'으로 여기며 개인의 일로 뭉뚱그리는 경향이 있어서 연대로 나아가지 못하기 일쑤라는 거다. (관련 기사:
장난감 총사진 올리고 자폭한다는 젊은이, 왜?)
일게이들에게 인간의 삶은 우습고 모순적이기에 함께 연대해 복원해야 할 이상 같은 것은 없다. 즉 그들에게 성스러운 건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마침내 이 생각은 '당위'로까지 도약한다. 인간에게 성스러운 것이 없다면, 그에 걸맞은 주제 파악을 '해야 한다'. 그것이 일게이들의 '충(蟲)' 윤리다.
노무현 투신에 대한 광적인 집착지금 이 순간에도 일베에서는 많은 일게이들이 개드립을 치며 자신들이 표현의 '자유'를 만끽하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다. 이때 노 전 대통령의 자살마저 한 자양강장제 CF의 "나는 자연인이다" "운지"(떨어질 운隕 + 땅 지地)라는 추임새와 함께 개드립의 소재로 퇴락한다.
이 개드립은 '충(蟲)' 윤리의 집약과도 같다. 일게이들에게 인간은 벌레고, 자연의 섭리 상 벌레의 자리는 땅이다. 그렇다면 자신의 정치 이상을 펼쳤던 노무현은 '우스운' 꼴로 뒤틀어 버려야 하고, <병맛만화> 주인공처럼 '급추락' 시켜야 한다. 이 레퍼토리는 집요하게 반복된다.
그의 죽음이 정적들의 표적수사에 의해 초래됐다며 분개하는 이들이 두고, 일게이들은 사인은 '중력'이라며 낄낄댄다. 물론 정말 그렇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다. 그것은 차라리 "중력"과도 같은 필연적인 현실에 감히 도전한 인간이 '버티지 못하고' 자살한 걸 왜 인정하지 못하냐는 조롱에 가깝다.
그런데 이런 식의 '자유'(?)를 과연 진정한 자유라고 할 수 있을까. 필자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은 자연과 인간을 혼동하고 있다. 인간이 자유롭다면 추락하는 한 방향으로만 활동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인간은 스스로 삶의 방향을 다양하게 개척할 수 있다.
일게이들의 문제는 자신들의 커뮤니티 질서를 능동적으로 변화시키지 못하고 '자연스럽다'고 여기는 데 있다. 거기서부터 일게이들은 인간이 아니라 자연의 존재인 벌레가 될 것을 스스로 자처한다. 아무리 당장 현실이 절망스러워도 인간의 현실은 자연현상과 별개다.
사람들은 뉴스의 주식시장 등락 그래프를 마치 일기예보 보듯 하고, 각자도생의 신자유주의 사회에서 벌어지는 온갖 비극들을 어쩔 수 없다는 듯 스쳐 지나가기 일쑤다. 그러나 현실은 어쨌든 인간들이 바꾸어간다. 이를 깨닫고, 존엄성을 인정받고자 했던 이들은 역사를 진보시켜왔다.
"인정받아야 한다. 그럼으로써 존재한다." (평화시장 재단사 전태일)그들은 벌레가 아니라 인간이다그러나 일게이들이 지향하는 건 자유가 아닌 '추락'이다. 문제는 자신들만 추락하는 것도 아니고, 진보하려는 사람들까지 발목 잡고 끌어들여 '추락'의 소재로 삼는다. 그래서 일베에서 이뤄지는 선택이란 '놀이터'의 질서를 수호하고 개드립이나 치는 것뿐이다. 여기에는 이용자는 죽어도 '놀이터'는 죽지 말아야 한다는 전도된 인식이 깔려있다.
놀이터가'"대한민국'으로 확장되면, 고통스러움을 호소하며 법질서에 도전하는 이들은 '종북좌파'가 된다. 충(蟲) 윤리는 맹목적인 충(忠) 윤리가 된다. 박정희와 이명박은 이 충(忠) 윤리의 수혜자일 뿐, '최고존엄'이 아니다. 그래서 "박정희, 이명박도" 노무현만큼 "재미있게 깔 수 있으면" 추천을 주겠다는 말은 예사롭지 않다.(렙***)
이때 일게이들에게 이 '좌좀 빨갱이'들은 이중적이라는 논리가 덧붙는다. "보수정당 까는 건 신들"렸지만, 김대중과 노무현을 "까면 개정색"하므로 "우덜식 자유"를 추구할 뿐이라는 거다(슨김**). 그러나 그 보수정당과 고착화된 체제가 과연 사람들의 삶에 봉사하는지에 대한 고민은 없다.
풍자와 비하의 경계는 윤리학자들의 오랜 논쟁거리였다. 그리고 으레 삶의 기준에 대한 '보편주의 vs 상대주의' 논쟁까지 거슬러 올라가기 일쑤였다. 필자는 아직 한참 부족하지만 여러 고민을 하고 있고, 현재는 삶에 보편적 기준은 있되 그것은 고정불변하는 게 아니라 진보라는 '방향'에서 '그때그때' 찾아야 할 뿐이라고 입장을 가지고 있음을 '감히' 말한다.
삶에서 여러 가지 선택지들을 치열하게 비교하고 고민하기를 두려워하지 않고, 더 많은 사람들의 존엄성이 인정받을 수 있도록 다양한 방향을 탐색하는 것. 그것이 살아서 움직이는 인간이 아닐까 싶다. 독일의 철학자 헤겔은 폭력에 반대하지 않았다. 그는 심지어 진보를 훼방 놓는 이들은 응당한 처벌이 필요하다고 봤다.
그에게 처벌이란, 원래 인간이 머리를 잘 굴려 진보를 지향할 수 있었음에도 시대착오적 판단을 해 '팀 킬'을 하는 인간들에게 합당한 책임을 지움으로써 "이성적 존재임을 인정"해주는 것이다. 반면 벌레는 책임을 지지 않으니까, 일게이들이 실제로 벌레 같은 짓을 해도 꿋꿋이 인간이라고 여겨야 하는 셈이다.
일게이들을 '일베충'이라고 '깨시민'(깨어있는 시민)들이 혐오하는 순간, 깨시민도 일게이들처럼 누군가를 혐오하게 되는 것이며 '주화입마' 당할 위험도 커진다. 그런 점에서 '닭근혜' '쥐명박'하는 식의 조롱도 분풀이나 될 뿐 대안은 될 수 없다. 그럴 바에는 굽시니스트 작가의 패러디 만화를 보는 게 훨씬 낫다. (관련 기사:
공무원 문턱에서 탈락, '일게이' 청년은 왜 그랬을까)
일게이들을 지나치게 감정·수동적이고 '자기 파괴적' 존재로 규정짓는 것도, 그들의 충(蟲) 윤리만 완성시킬 뿐이다. 실제로 자기 파괴적 경향성이 관측되더라도 말이다. 힘든 일이지만 용기를 내서, 이제는 그들을 벌레가 아닌 인간으로 마주하고 진정으로 '자율적' 존재로 설 수 있도록 돕는 현실적 대안을 찾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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