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아 상과 보살상, 그리고 절임을 알리는 관세음보살
이규봉
밑반찬은 이미 차려져 있고 밥과 국은 자신이 직접 떠다 먹는다. 은은한 나무 향기에 쾌적한 숙소, 창밖의 소박한 정원 그리고 정갈한 아침. 이 모든 것을 함께 보았을 때 우리가 낸 숙박비는 결코 비싼 것은 아니었다. 언젠가 아내를 데리고 다시 한 번 와야겠다는 생각을 들게 한다.
참된 보수주의란 이런 것이다 아침을 마치고 이즈하라 주변에 있는 우리와 관련된 유적지를 찾아 나섰다. 이즈하라는 대마도를 다스린 소오씨가 중부에 있는 사카에서 1486년 이주해 와 마을이 형성되고 메이지 유신 이후 지금의 이즈하라로 개칭되었다. 일본의 에도(江戶)시대에는 중국과 조선과의 교역항으로 발전하였고 한양에서 에도로 향하던 조선통신사의 중간 기착지 역할을 했다.
숙소에서 15분 거리에 있는 슈젠지(修善寺)에 먼저 들렸다. 이곳에는 조선 말 의병장 면암 최익현(1833~1906) 선생의 순국을 기리는 비가 절의 대문 바로 뒤에 우뚝 서 있다. 비 앞면에는 '대한인최익현선생순국지비(大韓人崔益鉉先生殉國之碑)'라고 적혀있고 뒷면에는 한국과 대마도 측 인사들의 이름이 적혀 있다. 최익현은 유학자이자 관리로 대원군의 잘못된 정치를 비판하는 상소문을 올렸고 친일개화파를 적으로 규정하여 개화정책 폐지를 요구했었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을사오적의 처단을 주장하는 상소문을 올리고 전북 태인에서 74세의 나이로 직접 의병을 일으켜 관군·일본군과 싸웠다. 그러나 1906년 일제에 의해 압송되어 대마도에 감금되었다. 선생은 일제가 주는 음식을 거부하며 단식을 결행하다 1906년 11월 17일(음력) 74세를 일기로 순국하셨다.
같은 달 21일 운구가 부산에 도착하자 전국의 유림과 백성 수만 명이 찾아와 곡을 했다고 한다. 그러나 당시 황제인 고종이 선생의 죽음에 조의를 표했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다. 운구는 충남 논산에 가매장되었다가 2년 뒤에 충남 예산군 대흥면에 안장되었다. 고향인 포천에 채산사가 건립되어 지금도 매년 선생의 넋을 위로하고 있다고 한다. 요즘과 같이 거짓 보수주의자가 판치는 사회에 최익현 선생이야말로 참된 보수주의자로 숭상받을 만한 인물이다. 이 비는 1982년 선생을 기리는 한국과 일본 사람들에 의해 세워졌다.
비운의 덕혜옹주다시 오던 길을 되돌아 역사민속박물관을 찾았다. 그 앞에는 커다란 쇼핑센터가 있고 숙소까지는 5분 이내의 거리이다. 박물관 앞 개천을 따라 올라가니 반쇼인(万松院)이란 절이 나온다. 이 절에는 역대 대마도주와 가족이 묻힌 묘역이 있다. 절에서 오른쪽으로 나 있는 길을 따라가니 덕혜옹주의 결혼을 축하는 봉축기념비가 보인다.
덕혜옹주는 고종과 양귀인 사이의 외동딸이다. 서녀(庶女)라는 이유로 일본에 의해 왕족으로 인정받지 못하다가 14살에 강제로 끌려 일본으로 유학을 갔다. 일본의 국익을 위해 대마도주인 소오타케유키(宗武志)와 1931년 5월에 사랑이 없는 정략적인 결혼을 해 도쿄에서 생활했다. 그러나 1955년 결국 이혼하였고 하나밖에 없는 딸이 1956년 실종되자 한국으로 돌아오려 했다. 그러나 당시 정치적인 문제로 1962년 되어서야 귀국할 수 있었고 창덕궁 낙선재에서 혼자 살며 평생 정신분열증에 시달리다 1989년에 76세의 나이로 쓸쓸히 사망한다.
결혼 봉축 기념비는 원래 이즈하라 시내의 가네이시 성터에 건립되었으나 이혼 후 사람들이 기념비를 뽑아 방치했다고 한다. 그러다 1999년 대마도와 부산 사이의 직항로가 개통되고 관광객이 몰려들자 2001년 11월 지금의 자리에 복원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