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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날의책
막스 피카르트 님이 빚은 이야기책 <인간과 말>(봄날의책, 2013)을 읽으면서 생각에 잠깁니다. 사람하고 말이 어떻게 이어지는가 하는 대목을 곰곰이 돌아보면서 빚은 이야기가 흐르는 책입니다. 사람이 지은 말이 삶을 빚고, 말은 새롭게 사람을 가꾸며, 다시 태어나는 사람은 말을 새삼스레 빚으며, 새삼스레 태어난 말은 더욱 눈부시게 삶을 가꾸는 얼거리가 무엇인가 하는 대목을 차근차근 짚는 <인간과 말>입니다.
한국에서 국어학자는 어원 연구도 하고 문법 연구도 합니다. 그런데 몇 가지 낱말을 놓고 말밑(어원)을 살피거나 밝힌다 한들 거의 모두 덧없기 마련입니다. 왜 그러한가 하면, 국어학자는 거의 다 '옛책에 남은 글'을 바탕으로 말밑을 살피기 때문입니다.
아직 어느 국어학자도 '말'이라는 말이 어떻게 태어났는지 못 밝힙니다. '밥'이나 '집'이나 '옷'이라는 말이 어떻게 태어났는지 아무도 못 밝힙니다. '해'와 '하얗다'를 같이 놓고 살핀다 한들, '하얗다'를 누가 언제부터 썼는지 아무도 알지 못해요. '먹다'라든지 '보다'라는 낱말을 언제부터 누가 썼을까요? 쑥은 왜 '쑥'이고, 마늘은 왜 '마늘'일까요? 감나무는 왜 '감'이고, 배나무는 왜 '배'일까요? '일'이나 '노래'는 무엇이며, '두레'나 '나락'은 무엇일까요? '씨앗'이나 '꽃'이나 '풀'이나 '나무'는 그야말로 언제부터 누가 지어서 썼을까요?
소리가 정신에 복무하는 것에 대한 보상인 양, 정신은 소리에게 정신처럼 자유로울 수 있는 권리를 선사한다. 그로 인하여 소리는 소리 이상의 것이 된다. 즉 소리는 음악이 될 수가 있다. (60∼61쪽)한국에서는 한국사람이 쓰는 말을 놓고 여러 가지 이름을 붙이곤 합니다. 이른바 개화기라고 하는 때까지는 그저 '말'이라고만 했습니다. 이 땅에 사람이 처음 나타나서 삶을 지을 무렵부터 1800년대 끝무렵까지는 그냥 '말'이었습니다. '우리말(또는 우리 말)'이라고 하는 이름은 왜 태어났을까요? 이 땅에 아프고 슬픈 발자국이 있기 때문입니다. 총칼을 앞세운 제국주의 권력 때문에 모질게 아프고 더없이 괴롭도록 슬픈 나날을 보내던 이 나라 사람들은 '우리 삶(이 나라)'을 지키고자 '우리말'을 외쳤습니다. 아주 오랜 옛날부터 쓰던 말을 되찾고 일본말을 몰아내고자 독립운동을 하며 '우리말'이라는 이름이 태어납니다.
그런데 목숨을 바치는 독립운동은 아주 오랫동안 펼쳐야 했고, 이동안 아주 많은 사람들은 '아무렇지 않게' 일본 한자말이나 일본 말투에 젖어들었어요. 해방이 되었어도 제 말을 제대로 찾은 사람이 몹시 드뭅니다. 이리하여 '토박이말'을 찾자는 물결이 일어납니다. 나라도 되찾았는데 왜 말을 되찾지 못하느냐고 하는 몸부림이라고 할 만합니다.
게다가 일제강점기에 일본 제국주의 권력자는 '국어'라는 말을 바보스레 퍼뜨렸어요. 중국에서는 '중국말(중국어)'이었고, 조선(아직 한국이 아닌 조선)에서는 '조선말(조선어)'으며, 일본에서는 '일본말(일본어)'이었는데, 일본 제국주의 권력자는 '아시아는 이제 천황 폐하를 섬기는 나라가 되어야 하고, 천황 폐하를 섬기는 백성(국민)은, 천황 폐하를 받드는 말(국어)'을 쓰도록 교육칙어라는 것을 내리지요.
'국어'는 '국민'이 쓰는 말이에요. '국민'은 바로 '천황폐하를 섬기는 나라에서 사는 사람'이고, '국어'도 바로 이러한 얼거리입니다. 그래서 '국민학교'라는 이름을 '초등학교'로 바꾸자고 하는 물결이 일었고, 이 물결은 '민주가 아니었던 정부'하고 오랫동안 싸운 끝에 비로소 학교 이름에서는 '국민'을 몰아냈습니다. 다만, 학교 이름은 '초등학교'가 되었어도, 아직까지 정치꾼들은 '국민 여러분'을 외칩니다. 신문사 가운데에도 '국민'을 이름으로 쓰는 곳이 아직 있지요. 다들 한겨레 발자국을 너무 모르거나 아예 생각을 안 하니 이런 '말'을 아무렇지 않게 씁니다.
언어가 단순한 상징이라면, 인간에게 미래란 존재하지 않는다. (82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