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도발 소식에 SNS에 쏟아진 '예비군복 인증' 사진과 글. 그들은 '전쟁불사'가 아닌 '사격중지'를 외칠 수는 없었던 걸까.
페이스북 갈무리
인정받고 싶은 욕구, 현실은 '헬조선'독일 프랑크푸르트대학 사회연구소 악셀 호네트 교수는, 사람이 '인정받고 싶은 욕구'를 지녔다는 데 주목한다. 사람들은 서로 사랑하고 또 인정받을 때 행복하고, 반대로 존엄성을 무시당하면 울분을 느끼기에 십상이다. 울분을 느끼면 '나를 좀 사람답게 대우해달라'는 식의 인정투쟁을 벌이기도 한다. 그게 노동자들의 파업일 수도 있고, 대학 구조조정에 반대하는 학생들의 목소리일 수도 있다.
특히 기득권을 향한 인정투쟁들은, 사회가 고인 물처럼 썩지 않게 꾸준히 체제를 변화시키며 이바지한다. 건강한 사회란, 점점 더 많은 사람이 인정받을 수 있도록 그 방식을 조정하고 다양화하며 진보하기 때문이다.
다만 강준만 교수는 그의 저서 <생각의 문법>에서 우리 사회의 인정 방식이 별로 다양하지 못함을 비판했다. '왜 우리는 'SNS 자기과시'에 중독되는가'라는 글이었다. 이 사회는 권력(權力)과 금력(金力) 위주로 인정이 이뤄지다 보니 자기과시가 너무 심해진다는 지적이다.
최근 급부상한 '헬조선' 담론도 이와 유사한 생각에서 출발하고 있다. 이 나라의 암담한 현실을 '헬조선(지옥+조선)'으로 묘사하고, '탈조선(나라를 떠나는 일)'이 불가능할 바에야 '죽창'을 들겠다는 청년들의 자조적 분위기다. 헬조선에서 '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기득권은 유리하고, 변변치 못한 집안에서 태어난 '나무수저'들은 애초에 불리해 계층이동이 힘들다. 나무수저들에게 권력과 금력 위주의 사회는 인정받을 구석이 잘 보이지 않을 수밖에 없는 사회다(관련 기사:
지옥보다 못한 '헬조선' "노오력은 해봤냐"는 꼰대들).
반면 평균적인 청년들에게 군대란, 사지 멀쩡하고 열심히 삽질하고 선후임 관계 원만하면 '에이스'로 인정받고 후일 '짬대우(서열 대우)'도 받던 곳으로 기억에 남는 곳이다. 단지 전역하고 보면 사는 게 녹록지 않을 뿐이다. 그래서 전역하면 "부대 쪽으로는 오줌도 안 누겠다"던 이들이, 군사대치라는 흔치 않은 기회(?)가 도래했을 때 "불러만 달라"며 인증 놀이를 하는 건 예사롭지 않다.
이때 현역 시절 무용담을 방언 터뜨리듯 말하고, 향수에 젖는 이들에게 어떤 '자긍심'이 감지되는 건 더욱 우연이 아니다. 사람들은 공동체로부터 자신의 가치를 인정받을 때, 자긍심을 얻는다. 이들에게 국가가 실제로 그들의 이름을 불렀는지는 중요해 보이지 않는다. 그저 "불러만 주십쇼"하고 인증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물론 인증놀이가 실질적이고 '값진' 인정을 이끌지는 별개의 문제다.
그들의 죽창은 '평범의 벽'을 뚫지 못하는가그럼 헬조선인들의 인정투쟁은 왜 평소에는 번번이 기득권들을 향하진 못할까. 닦달하는 주입식 교육, 살인적 취업난, 요원한 결혼과 육아, 의무는 많은데 권리는 적은 복지, 굴종을 강요하는 노동조건 등…. 헬조선에서 '죽창'을 들 명분들은 이미 차고 넘치는 데 말이다. 어떤 장벽이 가로막고 있진 않을까. 이를 가늠해 보고자, 데이터 기반 전략 컨설팅 회사 아르스 프락시아 연구원 김학준의 논문 하나를 참고해 봤다.
오늘날 신자유주의 사회는 사람들을 무한경쟁으로 닦달하며 빠르게 변화한다. 사람들은 뒤처지면 곧 배제되고 잊힌다는 상시적 공포와 불안을 경험할 수밖에 없다. 물론 이 감정은 아주 가끔 부조리한 현실에 대한 분노로 표출됨으로써 '인정투쟁'으로 이어질 때도 있다.
그러나 대부분 '어떤 벽'에 가로막혀 내면으로 응어리진다. 그 벽이란 이런 거다. '누구나 고통 하나쯤 있다', '누구든 노력하면 성공할 수 있다', '남 탓하지 말고 너나 잘해라' 등등…. 한 사람의 고유한 고통을 이러한 '평범 서사'로 퉁치는 기득권의 검열들은, 지나치게 남 눈치를 보며 인맥에 의존하는 현대인들을 솔직하지 못하고 감정을 숨기게끔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