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능진 선생
자료사진
"… 형사소송법 325조 후단에 따라 범죄 증명이 없는 경우에 해당하므로 피고인에게 무죄를 선고해야 한다."
27일 오후 2시 6분 서울중앙지방법원 509호 법정, 긴장한 얼굴로 재판장 최창영 부장판사(형사합의28부)를 응시하던 최만립 대한체육회 원로고문이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냈다. 그는 얼른 눈가를 닦은 뒤 다시 재판부를 바라봤다.
법정에 없던 피고인, 고 최능진씨는 최 고문의 아버지다. 독립운동가로 해방 후 미군정 경무부 수사국장으로 발탁돼 친일경찰 청산에 힘썼던 그는 이승만 대통령의 정적이었다.
1948년에 최씨는 대한민국 최초로 내란음모사건에 휘말리기도 했다. 실형 선고를 받고 복역하던 그는 한국전쟁 때 인민군의 정치범 석방을 계기로 풀려난 다음 인민군 치하 서울에서 정전·평화운동을 벌였다. 서울 수복 후 합동수사본부는 이 일을 빌미로 1950년 10월 25일 그를 영장 없이 끌고 갔다. 이듬해 1월 20일 육군본부 중앙고등군법회의(아래 군법회의)는 최씨의 이적죄(옛 국방경비법)를 인정해 총살형을 선고했고, 한 달 뒤 집행한다.
우리나라 사법제도는 3심이 원칙이지만 당시 재판은 단심으로 끝났다. 최만립 고문은 재심을 청구하며 아버지가 결백하기도 하지만 어떻게 민간인을 군사법원에서 단심으로 처형할 수 있냐고 지적했다. 그는 재심 개시 결정이 나기 전 열린 심문기일에서 수차례 "부친은 이승만을 반대했다는 이유만으로 정식재판도 못 받았다"라고 호소했다. 또 자신의 아버지는 민족주의자일 뿐, 북한에 동조할리 없다고 강조했다.
단 한 번 재판 끝에 총살당한 '비운의 민족주의자'재심 재판부는 최 고문의 주장 등을 종합해 최능진씨가 정말 북한을 위해 활동했는지를 따져봤다. 그런데 사건이 발생한 지 워낙 많은 시간이 흐른 터라 대부분의 기록은 존재하지 않았다. 유일하게 남아있는 것은 군법회의 판결문이었다.
최창영 부장판사는 "판결문에서 피고인이 공소사실에 대한 답변 등 여러 진술을 하고 있다"라면서 "이 진술은 공소사실을 인정하는 취지로 보기 어렵고, 피고인의 행위도 적을 돕거나 은닉·보호했다고 보기 어렵다"라고 말했다.
그는 "오히려 전쟁 다시 피고인이 주도했던 '즉시 평화·정전' 활동은 민족상잔의 비극을 방지하려는 목적으로 이뤄졌다고 봐야 타당하다"라고 밝혔다. 또 검찰과 최만립 고문이 제출한 다른 자료들을 봐도 유죄를 뒷받침하는 증거가 없다고 덧붙였다.
"주문을 낭독하겠다. 피고인은 무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