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갯짓을 할 줄 아는 나비한테 번데기 껍질은 이제 더는 생각할 일이 없다. 빈 번데기가 바람 따라 흔들린다.
최종규
마지막 한 시간 사이에 깨어났습니다. 번데기에서 고개를 처음 내미는 그때를 지켜보고 싶었으나, 올해에는 이 모습을 못 봅니다. 그래도, 고흥에서 다섯 해를 살며 '우리 집 나비가 번데기에서 나온 모습'은 올해에 처음 봅니다.
갓 번데기에서 나온 나비는 방울진 물이 몸과 번데기에 있습니다. 번데기를 가만히 살펴보니, 번데기에도 물이 고였습니다. 어떤 물일까요?
애벌레였던 옛 몸을 녹이고서 나비라는 새 몸이 된 셈일까요? 옛 몸을 녹였기에 나비라고 하는 새 몸이 될 수 있던 셈일까요? 엊저녁만 하더라도 번데기에는 검거나 파란 빛이 조금도 감돌지 않았습니다. 오늘 새벽과 아침에 이르러 비로소 검은 빛과 무늬가 찬찬히 드러났고, 이 빛과 무늬는 차츰 짙어지면서 나비라고 하는 아주 새로운 숨결이 태어났습니다.
그저 기어다닐 수만 있고, 아주 천천히 잎만 갉아먹을 수 있던 몸인 애벌레입니다. 이와 달리 가늘고 긴 주둥이로 꽃가루와 꿀을 먹는 몸인 나비요, 가볍고 커다라면서 고운 무늬를 아로새긴 날개로 훨훨 날 수 있는 나비입니다. 잎만 갉으며 푸른 빛깔인 애벌레라면, 꽃가루와 꿀을 먹고 이슬을 마시면서 아주 가볍게 바람을 타고 어디로든 날아오를 수 있는 나비입니다.
바람이 불 적마다 빈 번데기와 나비가 흔들립니다. 번데기에서 나온 나비는 좀처럼 번데기에서 발을 떼지 못합니다. 가는 실 한 오라기로 줄기에 매달린 번데기를 붙잡은 나비는 바람 따라 흔들리면서도 떨어지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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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란띠제비나비 1 ⓒ 최종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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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란띠제비나비 2 ⓒ 최종규
번데기에 남은 물은 천천히 사라집니다. 바람이 말렸을까요. 언뜻선뜻 스며드는 햇볕에 또 녹았을까요. 낮 12시 56분이 되자, 파란띠제비나비는 비로소 바람을 타고 번데기를 톡 놓습니다. 그러나 멀리 날아가지는 못하고 후박나무 굵은 줄기에 착 달라붙습니다. 어른으로 깨어난 나비는 이렇게 후박나무 굵은 줄기에 달라붙은 채 한 시간 즈음 있었고, 한 시간이 흐른 뒤에는 홀가분하게 날아오릅니다.
한 해에 세 차례 알을 낳아 깨어난다고 하는 파란띠제비나비이고, 팔월 끝자락에 깨어난 파란띠제비나비는 막내 나비입니다. 이제 어디로 나들이를 다닐까요? 다른 마을로 갈까요, 숲으로 찾아갈까요? 가끔 우리 집 마당으로도 찾아올까요? 어미 나비가 알을 낳아 잎을 먹고 번데기로 꿈을 꾸던 우리 집 마당 후박나무를 떠올릴 수 있을까요? 이듬해 새봄에 파란띠제비나비는 다시 우리 집 후박나무를 찾아와서 새롭게 알을 낳고 애벌레가 깨어나서 번데기를 틀고 또 다른 나비로 다시금 깨어날 수 있을까요?
여름 막바지 바람이 싱그러이 붑니다. 풀밭에 앉으면 파란띠가 푸른띠처럼 보이기도 하는 제비나비가 새파란 하늘숨을 듬뿍 마시면서 아름다운 한 삶을 누릴 수 있기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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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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