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미더머니 블랙넛 출연 모습
CJ E&M
긴 얘기를 지나 다시 블랙넛 이야기로 돌아오면, 그 역시 제 버릇 남 못 준다는 듯 김콤비 시절부터 지금에 오기까지 모쏠아다를 주된 캐릭터로 삼아 왔다. 더불어 앞서 말했던 PC함(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과는 거리가 먼 위험한 수위의 발언으로 점철된 가사를 뱉어대 왔다.
물론, 블랙넛이라고 이름을 바꾸고 나서 발표한 "양아치", "100", "Higher Than E-Sens"와 같은 트랙들은 과거 무료로 마구 공개했던 노래들에 비해 그 수위가 낮고, 감성의 결이 잘 다듬어져 있는 편이다. 그의 주 무기인 '최약자의 호전성'은 그대로인 채로 말이다.
힙합에서의 호전성은 보통 자신이 우위를 점하고 있는 부분을 강조하며 나타난다. 래퍼들은 경쟁적인 속성을 지닌 랩 배틀에서 상대의 약점을 공격하고, 자신의 장점(혹은 상대보다 나은 점)을 부각한다. 배틀랩 스타일의 노래에서도 자신의 랩 스킬이 얼마나 뛰어난지 다양한 표현법으로 과시한다.
반면, 블랙넛은 자신이 얼마나 한없이 약한지를 드러내면서 '잃을 게 없는 사람은 무서울 게 없다'와 같은 마인드로 호전성을 드러낸다. 적절한 희화화도 물론 섞여 있다. 그의 노래와 <쇼미더머니 4>를 통해 알 수 있듯이 블랙넛은 실제로 서울 중심의 한국 사회에서 호남 출신의 고졸 백수이고, 170이 안 되는 키와 깡마른 체격의 소유자다.
평범하게 생긴 데다가 친화력도 부족하며, 부모님의 부채를 먼 미래에 대물림받을 운명이기도 하다. 그런 그가 사회에서, 또 힙합씬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은 다른 게 없었다. 그저 랩을 잘하는 것 그 이상으로 충격을 가져다줄 수 있는 요소가 음악에 필요했으며, 블랙넛은 그 수단으로 나약함 속에서 피어나는 호전성을 선택한 것이다.
몇몇 곡을 통해 그의 호전성을 알아보면, 우선 데뷔 싱글 '100'에서는 100명의 프로 래퍼들을 거론하며 모두 이길 수 있다는 의지를 드러내지만, 끝내 마지막엔 농담이고 죄송하다는 말을 연신 내뱉는다.
<쇼미더머니 4> 1차 경연 곡인 "M.I.L.E. (Make It Look Easy)"에서도 "나 X나 멋있지?"라고 관객에게 자신 있게 말하지만, 곧바로 죄송하다고 사과한다. '빈지노'에서는 소재로 쓰인 래퍼 빈지노(Beenzino)에게는 모욕적일 수도 있는 말을 노래 내내 늘어놓지만, 자신은 그렇게 될 수 없음을 강조하며 닿을 수조차 없는 존재에 대한 헌사(?)를 보내는 거로 마무리한다.
또한, 호전성이란 코드와는 다른 결일 수도 있지만, '양아치'에서는 자신에게 눈길도 주지 않는 여자들을 욕했지만, 사실은 자신이 문제가 있는 사람이며, 찌질하고 더러운 양아치라고까지 묘사한다. 그의 호전성은 대체로 이렇게 자신의 위치를 각인시키며 성립된다.
어쩌면 그가 내뿜는 특유의 호전성은 지금에 와서 다소 위협적으로 변모했을 수도 있다. 이제 그는 단순히 힙합 커뮤니티 속 자작 녹음 게시판에 자신의 녹음물을 올리는, 래퍼가 되겠다고 설치는 백수가 아닌 현재 한국에서 가장 인기 있는 오디션 프로그램의 준결승 진출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모쏠아다임을 자처하고, 메이크업과 카메라 마사지를 받고도 딱히 잘생겨지지 않았다. 그저 딱딱한 국어책 플로우를 자랑하는 랩만 할 줄 안다. 세상에 욕만 했던 어제를 부끄러워하면서도 오늘을 떳떳하게 살기 위해 이제 겨우 세상에 한 발짝 나선 그가 과연 진정으로 위협적인지는 다소 아이러니이긴 하지만, 대중들 중 일부가 그런 인상을 받을 수 있다는 걸 배제할 순 없는 노릇이다.
'내가 할 수 있는 건'은 왜 보지 않는가 논란이 되고 있는 블랙넛의 가사와 노래를 어떻게 판단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여전히 고민의 지점이 남는다. 우선, 예술, 그리고 음악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어느 정도 선에서 이뤄지고 있느냐에 따라 다르긴 하지만, '졸업앨범'을 비롯한 과거 믹스테잎의 가사들은 하나같이 현재 한국 사회 분위기상 용인될 수 없는 지경이다. 중학교 짝꿍과 그의 남자친구를 강간, 살해하고, 친구의 엄마를 탐하고 싶다는 등의 내용은 사회적으로 받아들여지기 어렵다.
하지만 이 역시 트랙 안에 담긴 내용 그 자체가 아닌 믹스테잎 전체에 다른 어떤 맥락이 있다고 보면 판단은 달라질 수도 있다.
음란물에 관한 영미권 사회의 판결 사례 중 가장 대표적인 사례인 히클린 판결과 율리시즈 판결은 이에 좋은 예시가 될 수 있다. 히클린 판결은 1868년 영국에서 내려진 엄격한 음란물 규제의 효시가 된 판결로, 받아들이는 주체를 청소년과 같은 정서적 취약체로 지정하고 음란물을 판단한 사례다. 그래서 그 당시에는 부분적으로 들어갔다고 하더라도 음란한 지점이 있으면 무조건 음란물로 간주했었다.
그와 다르게 1934년, 미 연방 대법원에서 제임스 조이스의 소설 <율리시즈>를 두고서 내린 판결은 음란한 지점이 부분적으로 있다고 하더라도 그 부분이 어떤 의도에서, 왜 쓰였는지와 같은 큰 그림까지 보는 판결이었다. 이는 히클린 판결이 있은 후 수십 년간 지속되어 오던 음란물에 대한 기준을 확 뒤바꿔놓은 이례적인 일이었다. 개인의 자유를 강조하는 미국에서 내려진 판결이라지만, 율리시즈 판결은 지금까지도 표현의 자유에 관한 이야기를 할 때 자주 거론되는 사례다.
문제시되고 있는 블랙넛의 믹스테잎 [기형아 : Malformed]에는 그가 <쇼미더머니 4> 준결승에서 불렀던 '내가 할 수 있는 건'의 원 버전이 수록되어 있다. 이 곡에는 그가 어렸을 때부터 랩을 하고 있는 지금까지 얼마나 어두운 인생을 살아왔는지에 대한 이야기가 잘 담겨 있다. 그런데 대중들은 서두에서 말했던 '졸업앨범'의 가사만을 본다.
믹스테잎의 다른 수록곡들이 워낙 저속해서 '내가 할 수 있는 건'만으로 그 모든 내용을 퉁칠 수는 없는 노릇이지만, 이는 명백히 모두에게 공개된 맥락 중 일부분만을 편집한 것이다. 만약 '졸업앨범'뿐만 아니라 '내가 할 수 있는 건'까지 함께 웹을 돌아다녔다면 대중들 중 일부분은 어쩌면 지금의 히클린 판결과 같은 판단이 아닌 율리시즈 판결과 같은 판단을 내렸을지도 모른다.
블랙넛이 아무 행동도 하지 않으면서 "나 그런 사람 아니에요"라고 했으면 모르겠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모든 걸 공개적으로 풀어놨다. 아마 준결승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무대를 보고 감동한 사람 중 한 달 전쯤에는 그를 신랄하게 욕하던 사람이 있을 것이다.
지금, 한국에서 가장 유명한 돌연변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