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햏은 주류적 생활패턴을 전복하는 3가지 방식으로 일어난다. 이 과정중에 햏자들은 주류 사회로부터 무수한 비난과 핍박을 받는데, 이를 모두 견뎌내야 비로소 득햏의 경지에 이를 수 있다.
김풍
마침내 2002~2003년 '아햏햏'과 '폐인' 콘셉트가 급부상하면서 개념인 코드는 대중화 시기를 맞았다. 개념인이 되기 위한 "득햏"에 정진을 하는 수행자들을 "(수)햏자"라고도 했다.
'햏'이란 무엇인가? 불교의 공(空)이 결국 이론적으로 규정되기보다 체득돼야 하는 진리이듯, 햏은 그저 햏이며 단지 "체득"될 뿐이다.
체득은 어디서? 산에서? 아니지. 거긴 춥고 배고프니까. 컴퓨터가 있는 안락한 방으로 들어가야지. 디시인들은 이제 기성문화와 단절하고 폐인(閉人)이 됐다. 그리고 '하오체' 같은 의례들을 일상화하며 자신들의 품격을 유지하고 고유한 문화를 생산했다.
이단아 화가 오원 장승업의 생애를 담은 영화 <취화선> 포스터를 패러디한 건 아햏햏 문화의 상징과도 같다.
"세상이 뭐라하든 나는 나 장승업이오"를 "나는 나 아햏햏이오"로 변주한 건, 당시 디시인들이 '꼰대스러운' 기성문화와 스스로를 '구별 짓기'할 수 있는 정체성을 원했다는 걸 잘 드러낸다(관련 기사:
공무원 문턱에서 탈락, '일게이' 청년은 왜 그랬을까).
독한 손가락 '씨벌교황'과 '평등한 병신' 사상 그런데! 그런 디시조차 걱정거리는 있었다. 아햏햏과 하오체 조차도 태동하기 직전, 오직 존댓말만 쓰던 그 순수한 디시에…, 불청객처럼 찾아와 디시 일각에서 활동하기 시작하던 이른바 '씨벌교황'이라는 악플러의 존재였다.
그는 인터넷 초창기 욕설의 향연을 펼치며, 누리집들을 하나둘(디시 운영자 김유식 왈) "멍멍이판"으로 만든 인물로 유명했다. 욕설도 욕설이지만 <딴지일보>의 게시판 '1500페이지'를 혼자서 도배해버린 경악스러운 근성의 소유자였다. 게다가 운영자 제재와 법망을 너무나 잘 피해다녀, 가히 사이버 공간의 독재자로 군림했다.
어둠의 아우라에 매력(?)을 느낀 추종자들까지 생겼고, '런던귀공자' '소울 슬레이브' '다니엘' 등 1세대 악플러들이 등장해 그 못지않은 내공을 선보이며(?) 활개를 쳤다. 다음은 씨벌교황의 악플중 '극히'일부와 그에 대한 한 디시인의 회상이다.
"이시간 이후로 글 쓰는 개XXX놈의 개XX는 뒈질 줄 알아라. 뒈질 때 되면 X기미 X같은 숟가락 X나 짜증나게 탁 놓고 뒈진다 XX만한 XX들아. 쳐맞고 싶어서 발정났나? (중략) 여기서 고만 삐대고 날아가서 XXX XXX 좀 빨아 쳐무라. 행님 이제 가볼거니까 깝싸지 말고 조용조용히 놀그라 (후략)"(씨벌교황의 악플)"디시에 쌍욕과 악플을 최초로 시작해 반말을 정착화시킨 장본인이자 악플러 중의 제왕 격이죠. 네티즌들은 처음에는 씨벌교황의 악플에 존댓말로 대적했답니다. 부자 행세를 하며 돈 없는 사람들은 인터넷 할 자격도 밥 먹을 자격도 없으니 컴퓨터 꺼라 어째라 이런 말들이, 결국 보는 사람의 뚜껑을 다 열어버렸죠."(익명의 디시인)흥미롭게도 디시는 다른 누리집들과는 사뭇 달랐다. 씨벌교황과 추종자들에게 굴복하지 않고, 마치 "잽을 맞을수록 익숙해져 강펀치에도 쓰러지지 않는 권투선수처럼 강해지고 더 강해졌다. 디시인들의 근성은 속된 말로 거지보다 끈끈하고 대단했다."
씨벌교황과 디시인들의 근성 대결은 몇 년이나 계속됐지만, 어느 순간 디시인들은 그의 행동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경지에 이른다. 결국 그는 흐지부지 사라진다. 그러나 씨벌교황 등과의 오랜 전투로, 디시의 품격있던 '개념인' 문화와 '하오체' 의례가 2000년대 중반 완전히 소멸해버린다.
그리고 어느 순간 디시인들은 이미 씨벌교황 못지않은 욕설 프리토킹을 하고 있었다.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을 오마주한다면, 이렇게 묘사할 수 있겠다. "누가 씨벌교황이고 누가 디시인들인지, 어느 것이 어느 것인지 이미 분간할 수 없었다." 한편 씨벌교황의 유산은 그뿐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