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수근 기자가 취재하다가 지반 침식으로 강에 빠졌다.
정수근 제공
- 또 다른, 경험은요?"알잖아요. 낙동강 자전거 투어 때 박진고개에서 자전거 브레이크가 고장 나 벼랑으로 떨어질 뻔한 거. 최소한 다리 하나는 부러지는 상황이었는데, 다행히 다치진 않았죠. 철조망이 없었으면 그냥 낭떠러지로 떨어지는 건데. 그때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이게 다 강이 나를 버리지 않아서 다치지 않은 거라고. 다시 예전 모습으로 되돌아갈 수 있게 강이 도와달라고 보살펴 주는 것 같은 느낌.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몰라요."
지난 2013년 <오마이뉴스> 10만인클럽과 환경운동연합은 '흐르는 강물, 생명을 품다'라는 공동기획을 통해 자전거를 타고 낙동강 구간을 샅샅이 훑으면서 7일간 심층 취재 보도를 내보냈다. 정 처장의 사고는 둘째 날 현장 리포트(
내리막에서 결국 사고...그래도 또 달립니다)을 통해 소개됐다.
팔이 꺾이고 내동댕이쳐져- 싸움이 벌어진 적은 없나요?"왜 없어요. 근데, 싸움은 둘이 치고받는 거 아닌가. 일방적으로 당해도 싸움이라고 할 수 있나."
- 그럼 당한 일부터 이야기해보죠."4대강 공사가 한창 진행 중일 때였죠. 현장조사팀을 꾸려 합천보로 향했는데, 하청업체 용역들이 강으로 가는데 막더라고요."
- 아무런 이유 없이 막지는 않았을 것 같은데요."공사 현장이라고 들어가면 안 된다는 거죠. 아니 강이 자기들 거냐고. 왜 자기들 허락받고 출입해야 하냐고. 아무튼 그렇게 실랑이가 붙었는데, 하청업체 직원들이 우르르 달려들어서 팔을 뒤로 돌려 꺾었어요. 경찰이 꼭 범인 검거하는 것 마냥. 어이가 없더군요. 저항하다 끝내 바닥에 내팽겨쳐졌지요. 그때 다친 허리가 아직도 아파요. 골병이 든 게지요."
지난 2010년 12월 8일, 4대강 사업 예산은 당시 한나라당 김무성 원내대표가 진두지휘해서 '날치기' 통과됐다. 공사 진행방식도 다르지 않았다. 곳곳에서 육탄전이 벌어지고 공권력을 내세워 반대 목소리를 제압해 나갔다(관련기사:
"4대강 사업 공사현장을 왜 경찰이 지키나").
차마 꺼내지 못한 아픈 기억- 그런 일을 겪으면서까지 현장조사를 포기하지 않고 기사를 쓴 이유가 있나요?"낙동강은 한강 이남에서 가장 큰 강이죠. 가만히 보면 강줄기가 백두대간을 따라 혈관처럼 흘러갑니다. 인체에 혈관이 막히고 파헤쳐진다고 생각해봅시다. 몸이 멀쩡할까요? 마찬가지입니다. 국토의 혈관이 망가지면 국토가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고 그 속에 사는 우리도 멀쩡할 수가 없겠죠. 국민들 대다수가 4대강 사업을 욕합니다. 누가 봐도 상식에 어긋난 일이란 거죠. 국민들이 뜻을 모은다면, 강의 수문을 열고 국민적 합의를 통해 보를 철거할 수도 있다고 봅니다."
- 지치고 포기하고 싶었던 적은 없었나요?"왜 없었겠어요. 두세 번 정도 위기가 있었죠."
- 금전적인 이유 때문인가요?"아니요. 그런 건 아닙니다. 음……."
아픈 기억을 건드렸는지 그는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누구나 꺼내고 싶지 않은 기억이 있다. 누구보다 낙동강을 지키기 위해 두 발로 뛴 그이기에 잠시라도 강을 외면했던 세월을 끄집어내는 게 힘든 듯했다.
"4대강 공사가 끝나 보가 건설되고 담수를 앞둔 시기였어요. 힘들더군요. 죽을 힘을 다해 4대강 사업을 막아왔는데,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할지 막막하더군요. 만사가 귀찮아지고 더 이상 강에 나가기도 싫었어요. 패배의식과 무기력 증상에 빠져 허우적거렸죠. 게다가 애까지 아프니 그동안 내가 살아온 삶은 무엇이었나? 지나온 삶이 무의미해지는 기분이랄까. 왜 사람이 신념과 가치가 무너지면, 모든 게 다 무너져 내리는 것 같잖아요. 그때가 그랬어요."- 많이 힘드셨나 보네요. 그런데 한 번 뿐인가요?
"음... 한 번 더 사람에 대한 신뢰 때문에 힘든 적이 있었는데, 그 일은 차마 말 못하겠네요."
옥탑방 안에 묵직한 고요함이 내려앉았다. 곁에 있던 백재호 대구환경운동연합 운영위원장이 그가 겪은 아픔의 순간을 살짝 귀띔해준다. 너무 개인적인 일이라 글로 옮기진 않는다. 다만, 사람은 언제나 사람에게 가장 큰 상처를 받는다.
힘들 땐?- 힘들었던 시기를 극복하게 된 방법이 있나요?"현장에 나가는 거였죠. 옆에 있는 백재호 위원장이랑 여긴 없는데 이석우 팀장(대구환경연합 전 운영위원장)이 도움을 많이 줬죠. 우리 셋을 '낙동강 트리오'라고 부릅니다.(웃음) 사실 4대강 사업으로 낙동강이 크게 변했는데, 누구 하나 현장조사나 모니터링을 하는 사람이 없어요. 알아주는 사람이 없어도 현장조사를 하고 보는 사람이 없어도 기사를 썼어요. (웃음) 그거 알아요. '녹차라떼', '녹조라떼'라는 말, 우리 셋이 처음 만들었다는 거."
- 그래요? 저작권이 '낙동강 트리오'에게 있던 거군요?"그렇다니까요. 4대강 사업 후 녹조 문제가 가장 먼저 불거졌잖아요. 현장조사 후 언론사에 보도자료 뿌리고 기사 쓰면서 '녹차라떼', '녹조라떼'란 단어를 처음 썼다니까요."
'MB와 맞짱'을 선언하면서 그는 꽤 많은 수상을 했다. 2011년 포털사이트 다음의 블로그 시사부분 우수상을 비롯해 환경운동연합 우수활동가상(2013), 대구기독교교회협의회 인권상(2014), 시민단체의 환경상 중 최고 권위를 자랑하는 '임길진 환경상(2015)'등 모두 4대강 사업을 고발한 대가로 거둔 결과물이다.
- 현장조사는 매일 나가나요?"그렇게 못해요. 아까 가봐서 알지만 여기서 가까운 현장까지 차로 40~50분 가야해요. 큰마음을 먹어야 갈 수 있죠. 그리고 현장조사를 위해선 경비가 필요한데, 우리 사무실(대구환경운동연합) 경제사정이 그렇게 좋지 못해요. 같이 있는 식구들이 이해해줘서 일주일에 2번 정도 현장에 갑니다. 물론, 시급한 일이 발생하면 더 자주 갈 때도 있고요."
96년식 봉고차와 500만 원대 자전거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