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산일출봉 올라가는 길
황보름
이번이 세 번째던가, 네 번째던가. 마지막으로 성산 일출봉에 왔을 때가 2년 전 가을이었다. 그때 나는 무얼 봤던가. 친구들과 사진 몇 장 찍고 정상에 올라갔다 내려온 기억뿐이 없다. 급할 것도 없었는데 말이다. 기억을 조금 더 거슬러 올라가면 5년 전에도 또 다른 친구와 함께 왔었다. 정상에도 오르지 않고 그저 일출봉 초입에 넓게 펼쳐진 초원에서 역시나 사진만 몇 장 찍고 돌아갔다. 이때 역시 급할 것도 없었는데 말이다.
버스에서 내려 성산 일출봉 주차장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때 대형 관광버스가 아슬아슬하게 옆을 스쳐 지나갔다. 이미 관광을 끝내고 떠나는 버스와 이제 도착한 버스가 서로의 순서를 기다리며 사람들의 걸음을 막고 있었다.
성산 일출봉이 정면에 보이는 커피숍에 자리를 잡았다. 바 모양의 테이블 한구석에 앉아 오르기 전에 전체 풍경을 좀 가늠해 볼 요량이었다. 저 멀리 깔끔하게 재단된 길을 따라 성산 일출봉을 오르는 사람들이 보였다. 메르스 영향으로 관광객이 많이 줄었다고는 하지만 이곳 성산 일출봉엔 사람이 가득했다. 커피숍에도 마찬가지였다.
이십 분 정도 앉아 있었을까. 의자 하나를 사이에 두고 옆에 앉아 있던 여자가 내게 말을 걸어 온다. 나보고 한국인이냐고 묻는다. 그렇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그녀는 마치 외국에서 고향 사람을 만난 것처럼 반가워한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방금 정상에 올라갔다 내려왔는데 주위엔 거의 다 외국 사람들뿐이었다는 거다. 마치 해외로 혼자 여행 온 기분이었단다.
대전에서 온 그녀는 눈이 예뻤다. 그녀는 4박 5일 일정으로 혼자 여행하는 중이라고 했다. 1박씩 게스트하우스를 옮겨가며 이동 중이란다. 혼자 여행은 처음 하는 건데 어제까지는 모든 게 어색하기만 해 조금 후회도 됐단다. 그런데 오늘부터 아주 좋더라는 거다. 뭔가, 굉장히 홀가분한 기분이 든다고 그녀는 말했다. 혼자여도 씩씩할 수 있다는 것, 혼자여도 뭐든 할 수 있다는 것을 비로소 느끼게 됐다고 한다. 그래서 이렇게 말도 걸 용기가 생겼다며 그녀는 쑥스럽게 웃었다.
나도 함께 쑥스러워하며 지난 여행을 간략히 그녀에게 풀어놨다. 그녀는 내 이야기를 자기가 겪은 일처럼 흥미롭게 들어주었다. 이야기하면서 알게 된 것이 그녀가 전날 묵은 동네가 바로 내가 오늘부터 묵을 '종달리'였다는 것이다. 그녀를 통해 종달리에서 반드시 해야 할 두 가지를 알게 됐다. 하나는 지미봉을 오르는 것. 둘은 가정식 백반집에서 고등어조림을 먹는 것.
그녀가 먼저 떠났고 나도 조금 더 앉아 있다가 밖으로 나왔다. 화창한 날씨였다. 하늘도 푸르렀다. 성산 일출봉 정상을 오르기 전에 먼저 주차장 쪽으로 걸어갔다. 주차장을 가로질러 안으로 들어가니 홍보관을 비롯해 각종 먹을거리와 관광 물품을 파는 공간이 나왔다. 그곳에서는 서양인 예닐곱 명이 신기한 체험을 하듯 컵라면을 먹고 있었다. 많은 수의 외국인들이 파이프 모양의 과자에 듬뿍 담긴 아이스크림을 손에 들고 있었다. 나는 홍보관에 들렀다 편의점에도 들렀다 하는 둥 이리저리 서성였다. 그러다가 사람들 틈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렇게 넋을 놓고 얼마간 앉아있었을까. 중국인지 대만인지에서 온 일행 두 명이 나를 사이에 두고 앉더니 서로 마주 보고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마치 나라는 사람은 그냥 거기 박혀 있는 기둥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듯 상관도 하지 않고서. 나는 조금 궁금했다. 바로 옆에 귀가 멀쩡히 붙어있는 사람이 앉아 있는데 어떻게 그렇게 큰 목소리로 이야기할 수 있는 건지. 기분 좋게 앉아있다가 난데없이 날벼락을 맞은 나는 '이건 조금 예의가 아니잖아요'라는 의미로 귀를 딱 막고 일어나 보았다. 하지만 두 사람은 나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계속 이야기를 이어갔다.
성산 일출봉 정상에 오르다 인제 그만 성산 일출봉으로 올라가라는 뜻인 건가. 그러기로 했다. 올라가자, 성산 일출봉으로.
성산 일출봉은 약 오천 년 전 용암이 바다를 뚫고 올라와 수성화산 폭발을 일으켜 생성된 응회구다. 눈으로는 볼 수 없지만 위에서 찍은 사진을 보면 가운데가 움푹 팬 사발 모양 같다. 사발 모양 둘레에는 역시 우리 눈으로는 잘 안 보이는 봉우리들이 왕관처럼 죽 늘어서 있다. 이것이 마치 성벽처럼 보여 성산(城山)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일출봉은 영주 십 경 중 하나인 성산 일출에서 비롯되었다.
날은 점점 뜨거워지고 있었다. 동시에 사람들은 점점 더 몰려오고 있었다. 커피숍에서 만난 그녀의 말대로 주위 사람 대부분은 외국인인 듯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