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항복을 받는 미국. 1945년 9월 2일 전함 USS 미주리함에서 항복문서 서명식이 거행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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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이 패망에도 불구하고 별다른 응징을 받지 않음은 물론이고 오히려 안하무인격이 된 것은 결코 일본의 국민성 때문이 아니다. 여담이지만, 일본인들처럼 사과를 잘하는 민족이 어디 또 있을까. 식당이고 길거리고 가장 많이 말하는 표현 중 하나가 '스미마셍(미안합니다)' 아닌가. 사과 및 사죄를 싫어하는 나라가 아닌데도 유독 식민지배와 관련해서만 이렇게 오랫동안 뻔뻔스럽게 행동하고 있다면, 문제의 원인을 일본인의 국민성이 아니라 다른 데서 찾아야 마땅할 것이다.
그 책임의 원천은 바로 미국이다. 미국은 1945년 두 방의 총알(핵무기)을 발사해서 범인(일본)의 항복을 받아냈다. 하지만 미국이라는 경찰은 범인을 유치장 철창에 가두지 않았다. 전범 일본을 제대로 응징하지 않은 것이다. 또 패전국 취급도 하지 않았다.
미국은 자국과 함께 '범인 검거'에 나선 한민족에게는 민족 분단의 비극을 안겨주었다. 미국은 38선을 쭉 그어 우리 민족을 갈라놓았다. 범인 검거의 공로로 '용감한 시민상'을 주기는커녕 분단의 상처만 안긴 것이다. 동시에 미국은 전범 일본을 보호하고 비호하는 태도를 취했다. 최근에는 약간 약해지기는 했지만, 이런 태도는 지금까지도 계속 이어지고 있다.
물론 미국이 처음부터 그러려고 해서 그런 것은 아니다. 만약 국민당의 장개석(장제스)이 공산당의 모택동(마오쩌둥)을 물리치고 대륙을 석권함으로써 중국을 미국의 동아시아 전초기지로 만들어줬다면, 미국이 일본과 손잡고 일본을 부활 시키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어떤 동기에서건 미국은 일본을 '특별사면'하고 부활 시켰다. 이처럼 앞뒤 맞지 않는 모순된 행동은 미국이 세계를 이끌 도덕적 자격이 없는 나라임을 증명했다. 미국은 사익을 위해 범인을 풀어주고 범인과 동업한 악덕 경찰이다.
일본이 믿는 구석올해로 해방 70주년이다. 해방 70주년이 되도록 한국에서 친일파가 청산되지 않고 일본이 틈만 나면 독도에 군침을 흘리는 것은, 칼자루를 쥔 미국이 일본을 보호하고 편들어왔기 때문이다. 미국이 편들지 않았다면, 남북한·중국·대만·러시아가 일본한테 이를 가는 이 살벌한 동아시아 환경 속에서 일본이 저처럼 뻔뻔스럽게 행동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일본인 심리를 분석한 루스 베네딕트의 고전 <국화와 칼>에도 언급됐듯이, 일본은 상황 변화에 민감하고 머리도 잘 숙이는 나라다. 그런 나라가 이웃나라들의 합동 공세를 무시하고 제대로 사죄를 하지 않고 있다면, 그것은 믿는 구석이 있기 때문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그 믿는 구석은 당연히 '비리 경찰' 미국이다.
일본의 항복 이후로, 시간이 흐름에 따라 일본에 대한 미국의 애정은 한층 더 노골적이 되었다. 미국은 1960년대에는 일본을 한국의 위에 앉히는 일까지 벌였다.
미국은 기존에 제각각 작동하던 미일동맹과 한미동맹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었다. 그래서 미일안전보장조약(1951년)을 미일상호협력안보조약(1960년)으로 개정하면서 미일 군사협력을 한 단계 더 업그레이드 시켰고, 1965년 한일기본조약(한일협정) 체결을 배후에서 조종함으로써 한·미·일 삼국이 느슨하나마 3국 동맹체제를 형성하도록 만들었다.
미국이 한일기본조약 체결을 부추겼다는 점은, 조약 체결 전년도인 1964년 10월 국무성이 윌리엄 번디 동아시아·태평양 차관보를 서울에 보내 조약 체결에 대한 지지를 공개 천명함으로써 한국 내의 조약 반대 여론을 잠재우려 한 사실에서도 잘 드러난다.
미국이 한일기본조약을 통해 한미일 삼각동맹을 완성했다는 점 못지않게 불쾌한 것은, 이 삼각동맹 내에서 한국이 3위의 위상을 갖고 있다는 점이다. 일본이 미국의 동아시아 대리인 역할을 하는 전제 하에서 삼각동맹이 형성됐으니, 이 동맹 안에서 한국의 지위는 미국은 물론이고 일본한테도 뒤질 수밖에 없었다.
물론 일본이 갖고 있는 2위 자리를 쟁취해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지난날 우리에게 수모와 치욕을 안겨준 '전범' 밑에서 삼각동맹을 형성해야 한다는 것 자체가 불쾌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렇게 1945년 이후 뒤이어 1960년대에 미국은 한미일 삼각동맹 체제를 건설하면서 일본을 한국의 상위에 앉혀놓았다. 이렇게 위에서 아래로 한국을 내려다보게 됐으니, 일본이 한국의 사죄 및 배상 요구에 순순히 응할 리 있었을까. 비웃지만 않아도 다행이 아니었을까. 이 모든 부조리와 모순의 출발점이 미국이 아니라고 할 수 있을까.
일본에 대한 미국의 무분별한 애정은 일본에 대한 동아시아 각국의 도덕적 공세가 강해지는 최근에도 시들어지기는커녕 오히려 단단해지고 있다. 금년 4월에 미국은 1960년의 미일동맹을 한 단계 더 업그레이드 시키면서, 일본 자위대가 세계 어디든지 출동할 수 있도록 뒷받침해 주었다.
또 한미일 3국 군사정보 공유라는 미명 하에 일본군이 한국군의 군사정보까지 공유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었다. 일본에 대한 미국의 사랑은 참 너무나도, 식지 않는 사랑이다. 이 사랑은 권태기도 없는 사랑이다.
부조리와 모순의 출발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