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떠난 후에 남겨진 것들>의 표지
청림출판
여보! 인생이 성적순이 아니듯, 죽음이 나이순이 아니란 것을 새삼 깨닫게 하는 사연이 유독 이 책에는 많소.
그중에 한 청년의 죽음 이야기 앞에서는 옴짝달싹 못할 지경이오. 네일 아티스트를 꿈꿨던 청년은 비좁은 원룸텔에 혼자 살면서 열심히 학원을 다니며 네일 아트를 배웠던 것 같소. 그의 책상 위에는 자신에게 주문을 걸어주는 메모도 붙어 있었소.
'괜찮아, 잘 될 거야.'
그의 삶이 얼마나 괜찮지 않았는지를 역설적으로 보여주는 쪽지가 아니겠소. 청년실업의 심각성 앞에 우리는 정부를 향해 손가락질한다거나, 돼먹지 못한 사회적 현상이라 치부하며 읍소하고 있지는 않은지 생각해 볼 일이오.
이 사회가 버거워 견디지 못한 청년은 누구도 반기지 않는 주검으로 변해 이 세상을 떠났소. 그리고 유품정리사가 집주인의 요청으로 그의 시신이 있던 공간을 청소하며 이런 글을 남겼소.
"누구에게도 당신의 이웃이었던 한 젊은이가 죽었다고 알릴 수 없었다. 청년의 죽음은 비밀에 부쳐진 채 현장은 정리되었다. 무슨 일이냐고 묻는 사람들에게 있지도 않은 개가 죽었다고 거짓말을 해야 했고, 애도는커녕 개를 버려 굶어 죽게 만든 사람으로 고인을 비난받게 만들었다."(본문 171쪽)여보, 왜 사람들은 안타까운 죽음을 들으면 같이 슬퍼하고 애도하면서도, 자기 집 주변에서 변사체가 발견되었다거나 자살했다고 하면, 극도로 히스테릭해지는 이중성을 보이는 것일까요.
아픈 사정을 물어보기는커녕 왜 소금이라도 뿌릴 듯한 기세로 차가운 시선을 던지는 것일까요. 집값이 떨어진다, 방세가 안 나간다 등등의 맘몬이즘(Mammonism)을 뛰어넘을 수 없는 인간의 가벼움은 무엇으로 설명해야 할까요.
혹 청년이 인생을 포기할 수밖에 없는 사연이 이런 이웃의 매정함과 무관심 때문은 아닌지 모르겠소. 여보! 아들딸 키우는 부모로서, 이 이야기가 남의 이야기만 같지는 않소.
맘대로 죽을 수 있는 집이 따로 있다?여보, 이제 고독사는 이 청년의 예에서처럼 독거노인들만의 것이 아닌 게 분명하오. 몇 개월이 지난 시신이 발견되었다는 뉴스가 심심치 않게 등장하는 현실이니 말이오. 곁을 지키는 이가 있는 죽음과 아무도 없는 채로 홀로 맞는 죽음은 간 사람에게는 천지 차이일 것이오. "아무도 없이 홀로 맞는 죽음, 아무도 거두지 않는 죽음은 그래서 가슴 아프다"는 저자의 말이 더욱 가슴을 파고드는 이유가 여기 있는 게 아니겠소.
홀로 살다 죽은 시신의 경우 무연고 시신으로 분류되면 병원 해부용으로 사용된다는 이야기도 있으니 죽은 후에도 무엇인가 공헌을 하는 건 좋은데, 마냥 고운 마음만은 아니구려. 자기 소유의 집에서 죽음을 맞는 이들은 모르는 아픈 이야기도 있다오. 같이 늙어가는 집주인에게 세를 들면서 할머니가 했다는 말, 목이 메게 하는구려.
"할아버지, 내가 나이도 있고 여기서 살다 보면 저 세상에 갈 수도 있는데, 나 여기서 죽어도 돼요? (중략) 우리 같은 노인네는 그렇거든. 이제나 죽을까, 저제나 죽을까, 자다가 조용히 죽어야 할 텐데. 그러잖아. 그래서 별 뜻 없이 괜찮다고 했지. 그런데 이렇게 빨리 죽을 줄 누가 알았누"(본문 46쪽)여보, 허락받지 못했다 개의 죽음으로 전락한 청년의 죽음에 비하면 이 할머니의 죽음은 허락받은 죽음인고로 행복한 모양새구려. 허 참! 대부분은 셋방살이하다 죽는 이들의 모습은 그리 환영받지 못할 거라는 생각을 하니 눈시울에 이슬이 맺히는구려. 죽으려고 허락받아야 하는 인생이 있다는 생각을 하니 말이오.
아버지보다 돈?돈이 이미 인륜을 뛰어넘어 행세하고 있다는 걸 모르는 이는 없을 것이오. 그런데 죽음의 현장에서 보이는 산 자들의 추태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지경도 있다고 하오. 망자는 남은 자식들이 잘 볼 수 있도록 수의 버선에 돈을 저축해 두기도 한다는군요. 그런데 혼자 죽은 부모가 혹시 무어라도 값나갈 것 남기진 않았나 찾느라 자녀들이 생쇼를 하는 경우도 있다고 하오.
한여름 코를 찌르는 냄새로 가족들조차 접근하기 힘든 죽음의 현장에서 저자가 유품정리 작업을 할 때의 이야기요. 질퍽한 장판을 들추자 흥건히 젖어 심각한 모양새를 한 지폐가 빼곡히 깔려 있었다고 하오. 방안으로 접근조차 안 하던 망자의 아들이 허겁지겁 달려들더니 대야에 쓸어 담았다 하오. 당연히 잘 씻어서 가족에게 넘겨줄 것인데 그리했다는 거요.
"아들 눈에 보이는 것은 오로지 돈뿐이었다. 그의 눈에, 머리에, 가슴에 홀로 쓸쓸히 죽음을 맞이한 아버지는 없었다"고 저자는 말하고 있소. 돈 때문에 부모를 죽인 아들보다는 나을지 모르지만, 보아야 할 건 보지 못하고 보지 않을 것만 보는 올바르지 못한 모습 아니겠소. 그런데 이런 현상이 이제는 너무 많이 일어나니 참 마음 아프오.
여보, 우리가 남겨야 할 게 무엇이라 생각하오. 책을 통해 죽은 자들이 남긴 쓰레기를 치우느라 동분서주하는 저자의 모습을 보면서, 덜 갖고 덜 쓰는 게 좋겠다 생각하오. 차라리 유품정리사가 필요 없는 삶을 사는 게 진짜 이름을 남기는 삶이 아닐까 생각하오.
저자도 "더 이상 이 일을 하고 싶지 않다. 고독사, 자살, 범죄로 인한 사망... 이런 비극이 사라져 나의 직업이 더 이상 필요 없게 되기를 바란다"(11쪽)고 쓰고 있소. 이제 더 이상 죽은 자를 개로 만들어서도, 개가 되어 죽어서도 안 되겠기에, 쓸쓸한 이웃은 없는지 곁에 시선을 주며 삽시다. 여보!
떠난 후에 남겨진 것들 - 유품정리사가 떠난 이들의 뒷모습에서 발견한 삶의 의미
김새별 지음,
청림출판,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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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행복이라 믿는 하루가 또 찾아왔습니다. 하루하루를 행복으로 엮으며 짓는 삶을 그분과 함께 꿈꿉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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