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개항누리길에서 만난 인력거꾼, 인력거도 개항과 함께 들어왔다.
김종성
인천 중구청 주변의 개항 누리길은 과거 제국주의 열강들의 각축장으로 근대문명의 자취가 고스란히 남아있는 공간이다. 중구청을 중심으로 형성된 주변 거리는 우리나라 개항기 근대건축물이 밀집되어 있다. 1883년부터 일제 강점기에 이르기까지 당시에는 생소한 용도의 건물인 은행, 교회, 상점 등이 각국 풍의 양식에 따라 자리하고 있다.
이 길의 명소 가운데 하나는 청일 조계지 경계 계단이다. (인천시 기념물 제51호) 1883년 설정된 일본 조계와 1884년 마련된 청국조계와의 계단으로 자유공원과 연결된다. 중앙에 돌계단을 배치하고 양쪽에 조경공간을 두어 이 계단을 중심으로 확연하게 다른 청국과 일본 건물들이 배치되었다. 계단 양쪽의 석등 모양도 그래서 다르고, 건물 생김새도 완전히 다르다. 120년 역사를 간직한 이 계단은 중국과의 국교가 수립된 후 새롭게 정비되어 계단 위쪽에는 청도에서 기증한 공자상이 세워졌다.
차이나타운과 제물포가 화교들의 집단 거주지였다면, 중구청 주변은 일본인들이 모여 살던 일본조계의 중심 거리였다. 새로운 건물이 많이 들어서 있기는 하나, 일부 건물은 당시 그대로의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어 인상적이다. '인천개항박물관' 역시 그 가운데 하나. 일본 제1 은행으로 지어진 이 건물은 광복 이후 한국은행 인천지점으로 운영되어 오다가 개항 당시 이 거리의 풍경을 소개하는 박물관으로 활용하고 있다. 1883년 개항 후 인천항을 통해 처음 소개된 근대문물 가운데 대표적인 것들을 전시해 관람객들에게 소개하고 있다.
중구청 앞 개항누리길 거리에 있는 인력거꾼 조형물엔 사람들이 너도나도 다가가 사진을 찍을 만했다. 인력거 또한 일본에서 들어온 문물이다. 실물 크기로 만들었는데 특히 일본사람이 착용하던 신발 '게다(일본 나막신)'까지 세심하게 표현해 웃음이 났다. 일본인을 비하하는 단어 '쪽발이'도, 게다를 신는 것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있다. 나막신을 신으면 엄지발가락과 나머지 발가락들이 '쪼개지는' 것을, 소나 돼지와 같이 발굽이 두 개로 갈라진 동물의 발(쪽발)에 빗댄 말이라고 한다.
인천 개항박물관은 후기 르네상스식 외관을 띠고 있다. 여느 박물관과는 달리 친근한 물건이 많다. 박물관에 따르면, 개항되기 전까지 우리는 불을 켜기 위해 부싯돌을 썼다고 한다. 개항 후 인천을 통해 들어온 물건이 성냥이다. 그래서 '인천'하면 성냥공장을 빼놓을 수 없다. 당시 인천에 성냥공장이 번창했던 것은 인천이 항구도시라는 특성상 값싼 노동력이 풍부했기 때문이다. 압록강 일대의 나무들을 신의주를 거쳐 인천항으로 반입하여 재료조달이 수월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당시에는 집들이나 개업선물로 성냥세트를 선물로 가져갔다고도 전해진다.
인천 개항장 근대건축전시관은 개항박물관보다 그 규모가 크진 않다. 이곳 역시 일제의 일본 제18 은행으로 사용되었던 건물이다. 아담한 전시장 내부에는 당시 이 거리를 따라 들어섰던 각종 건축물의 모형이 전시되어 있다. 6·25전쟁과 이후 철거가 이루어지면서 대부분의 근대건축물이 남아 있진 않다. 하지만 당시의 풍습을 박물관에서나마 만나볼 수 있다는 것에 의의가 있는 전시관이다. 물론 이곳에 전시된 건축물 모형 중에서는 현재까지도 그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건축물이 다수 존재한다. 전시관을 둘러본 후 아직 남아있는 몇몇 건축물을 둘러보아도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