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장굴 끝에 서 있는 용암기둥
황보름
화산이 폭발하며 용암이 분출됐고 지표로 분출된 용암은 계곡이나 하천을 따라 흘렀다. 그러다 대기와 접한 표면은 급속히 냉각되어 굳어졌고, 반면 내부는 고온을 유지하며 계속 흘러갔다. 그렇게 용암이 흘러가고 더 흘러가다 아무것도 흐를 것이 없어지자 거대한 공간이 나타났다. 나중에 사람들에 의해 용암동굴이라 불리게 될 이 공간은 그렇게 한참을 혼자 살아냈다.
그러다 제주에 사람이 살게 되었다. 호기심과 모험심이 가득한 제주 사람들은 제주 이곳저곳을 탐험하기 시작했다. 왠지 위험해 보이는 이곳 만장굴까지 사람들은 탐험을 계속해 나갔다. 그렇게 만장굴은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고, 이제 이곳은 더는 탐험을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화산이라든지, 용암이라든지, 세계문화유산 등의 이미지를 안고 사람들은 만장굴을 경험하기 위해 이곳에 온다. 경험을 위한 만장굴은 더는 위험하지 않다. 내부를 밝히는 빛이 곳곳에 세워져 있고, 우리는 안전하게 만장굴 내부를 걸을 수 있다.
만장굴을 걸으며 느낄 수 있던 것은 추위뿐만이 아니라, 시간의 흐름이었다. 어마어마한 시간이 흐른 덕에 이제 용암동굴의 내부를 용암이 아닌 사람이 흐르게 된 것이 아닌가. 나는 만장굴을 걸어가는 것 자체가 그래서 왠지 현실적으로 다가오지 않았다. 만장굴에 켜켜이 쌓인 시간의 흐름 속으로 그저 빠져들고 있는 것만 같았다.
700만 년 전에 형성되었다는 만장굴을 겨우 한 시간 남짓 걷는다고 해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건 없을 것이다. 그저, 시간이란 개념을 어렴풋이 한 번 더 떠올려볼 수 있을 뿐.
이런 생각을 하며 걷고 있는데 이제는 춥다 못해 몸이 떨려왔다. 이는 나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650m 지점에 이르자 춥다고 찡얼거리는 딸을 둘러업고 가는 아빠를 볼 수 있었다. 850m 지점에 이르자 욕 비슷한 말을 내뱉으며 몸을 주무르는 한 남자를 볼 수 있었다. 나도 더는 참지 못하고 가방에서 점퍼를 꺼내 입었다. 동굴 벽을 손으로 만지기도 하고, 쉼터 비슷한 곳에 놓여 있는 벤치에 앉아 심각하게 공기를 들이마시기도 했다. 그러면서 드디어 만장굴 끝에 도착했다.
눈앞에 보이는 것은 7.6m 높이의 거대 돌기둥. 세계적으로 가장 긴 용암 기둥에 속한다는 이 기둥은 천장 틈으로 흘러들어온 용암이 바닥에 떨어지면서 굳은 것이라고 한다. 사실 만장굴은 돌기둥 뒤로도 죽 이어져 있지만, 관람객들은 이곳에서 더는 나아가지 못한다. 더 나아가지 못하는 아쉬움을 달래려 관람객은 그저 연신 사진을 찍어댈 수 있을 뿐이다.
나는 이왕 여기까지 온 김에 시간을 두고 천천히 돌기둥을 감상해보려 했지만 뒤에서 뭔가 시끄러운 기운이 다가오고 있는 것이 느껴져 뒤를 돌아보았다.
동굴 전체가 흔들릴 정도의 거대 소음이 가까워져 오고 있었다. 서서히 소음의 정체가 밝혀진다. 고등학생 무리다. 한두 반도 아닌 듯 그 수가 엄청나다. 나는 이곳을 빨리 빠져나가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미친 듯 만장굴 입구 쪽으로 뛰듯이 걸었다. 하지만 만장굴엔 아무런 관심도 없는 남자 고등학생들의 속도를 이길 수는 없었다.
세계에서 가장 긴 용암 기둥 앞을 지키고 있던 선생님과 눈인사를 마친 아이들은 엄청난 속도로 입구를 향해 다시 돌아 나오고 있었다. 추위가 아이들에게 더 힘을 실어주고 있는 듯했다. 각종 욕을 다정하게 나누며 아이들은 나란 존재는 아랑곳하지도 않으면서 나를 둘러쌌다. 여학생 무리까지 합세했다. 이렇게 나는 몇백 미터를 소음 속에 갇혀 이동해야 했다.
아, 드디어 입구다. 철제 계단을 아이들과 함께 올랐다. 입구를 나서는 아이들은 다시 한 번 다정하게(?) 욕을 나눈다. '아, XX. 짜증 나. 밖은 또 왜 이렇게 더워!' 아이들 말대로 정말이지 짜증을 유발하는 뜨거운 햇볕이 여전히 거기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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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생처음 킥복싱>, <매일 읽겠습니다>를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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