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행 성공회대 석좌교수.
이희훈
1993년 서울대학교 공과대학에 입학한 학생이 한 명 있었다. 당시 대학입학시험이었던 학력고사의 사지선다 객관식 문제에 최적화된 일차원적 두뇌를 가진 전형적인 공대생이었다. 하지만 대학에 들어왔으니 왠지 사회과학 서적도 읽어줘야 미팅 나가서 여자 앞에 똥폼이라도 잡을 수 있을 것 같아 선택한 책이 하필 마르크스의 <자본론>이었다. 바로 김수행 교수가 번역한 비봉출판사 판.
역시 자본론은 어려웠다. 분명 한글로 되어 있는데, 영어로 된 전공서적을 읽을 때보다 더 이해가 되지 않았다. 어떻게든 내용을 이해하고 싶어 <자본론> 관련 해설서를 찾아 봤는데, 그때 발견한 책이 한길사에서 출간된 <政治經濟學原論(정치경제학원론)>이었다. 이 책의 저자 역시 김수행 교수였다.
<자본론>을 읽고, 삶이 달라졌습니다김수행 교수가 번역한 마르크스 <자본론>을 김수행 교수가 쓴 해설서의 도움으로 읽어내며, 공대생은 태어나 처음으로 자본주의 체제에 대해 '개안(開眼)'하게 된다. 책을 읽기 전까지만 해도, 소위 자유로운 상거래를 보장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빈부격차가 발생하는 이유는 각 개인의 능력 차이에서 비롯된다는 주장만 들어왔다.
그런데 마르크스 <자본론>에 따르면 빈부격차의 진정한 원인은, 자본가가 자신이 고용한 노동자로부터 시간을 빼앗기 때문에 발생하는 현상이라는 것이다. 게다가 노동자가 시간을 빼앗기는 과정을 마치 물리법칙을 증명하듯 숫자로 풀어서 증명해 놓지 않았나. 요컨대 자본주의 사회 역시 착취에 기반을 둔 사회라는 것이다.
마르크스 <자본론>을 이해했을 때의 느낌은, 영화 <매트릭스>에서 주인공 네오가 모피어스에게 빨간약을 받고 세상의 진실을 보게 됐을 때와 비슷했다. 그동안 사회에 대해 가져왔던 여러 의문점이 한 번에 해소되는 흔치 않은 체험을 한 공대생은, 자연스럽게 김수행 교수의 관련 수업도 신청해서 듣게 됐다. 그렇다. 대한민국에서 마르크스 <자본론>을 접한다는 것은 김수행을 읽는 것이었다.
<자본론>을 '제대로' 이해한다는 것은 삶이 달라지는 것이다. 얼떨결에 공과대학에서 반도체 소자 연구로 석사과정을 마치고 기업에서 꼬박꼬박 월급 받으며 연구원을 하고 있었지만, 정말 하고 싶은 것은 따로 있었다. 결국 2006년에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대한민국을 바꾸는 데 일조하겠다며 민주노동당 활동에 투신(?)하게 됐다.
당 활동을 하던 중 베네수엘라 차베스 대통령의 21세기 사회주의에 대해 다룬 <차베스, 미국과 맞짱뜨다>을 첫 책으로 쓴 것이 인연이 되어 인문사회 저자로서의 삶을 시작했다. 베네수엘라와 차베스에 대한 책으로 저자의 삶을 시작했지만, 사실은 마르크스 <자본론>의 대중적 입문서를 쓰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