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규석 만화가
김영숙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부터 그림을 그렸다. 어릴 때부터 만화를 그렸다. 초등학교 1학년 때 네 살 많은 같은 반 형이 있었다. 시골이다 보니 흔한 경우는 아니지만, 가정형편이 어려워 학교에 늦게 들어왔다.그 형이 또래와 비교하면 그림을 잘 그렸는데, 신기해서 따라 그렸다. 그때 그림에 재미를 처음 느꼈다. 그때부터 학교에 갔다 오면 그림을 그렸는데, 종이가 귀해서 달력에다 그림을 그리고 싶어 한 달이 빨리 지나가기만을 기다렸다."1977년 경남 진주에서 태어난 최 작가는 2남 4녀 중 막내다. 그는 경제적인 여유가 없는 가정형편으로 그리고 싶은 그림을 맘껏 그릴 수 없었다. 그러나 그림에 대한 꿈을 포기하지 않았다. <대한민국 원주민>이란 만화에서 유년시절 경험을 소재로 다루기도 했다.
"중학교 때 만화에 확실히 빠졌다. 일본 해적판 만화가 들어오던 때였는데, 그때 마음에 들던 일본 만화가 있었다. 그전까지는 만화가 좀 유치하다고 생각하는 경향도 있었지만, 다양한 만화를 접하면서 만화 자체에는 한계가 없다고 생각했다."고등학교에 진학해 만화 동아리에 가입했고, 고교 3학년 때 미술학원에 다녔다. 학원에 다니던 중에 상명대에 처음으로 만화학과가 생겼고, 그곳에 입학했다.
1998년 단편 <솔잎>으로 서울문화사 신인 만화 공모전 성인지 부문 금상을 수상하며 데뷔했다. 동년배보다 빨리 데뷔했지만, 군대에 입대했다. 제대 후 2002년 단편 <콜라맨>으로 동아 LG 국제 만화 페스티벌 극화 부문 대상을 받았고, 이듬해 단편 <공룡 둘리>로 인기를 얻어 유명작가 반열에 올랐다.
공모전에 당선돼도 소용이 없었다. 한국에서 만화가 침체기여서 두 번 입상해 당시 유명한 신인이었지만 연재할 수 있는 곳이 없어 창원으로 내려갔다. 이 정도 했는데 안 되는가 보다 생각하고 미술학원에 취직했다. 아는 편집자가 <경향신문> 주간 만화 부문 4페이지를 하자고 해서 했다. 1년 하니까 만화만 그려도 먹고 살 수 있어, 미술학원을 그만두고 올라왔다. 그 후 2005년 <습지생태보고서>, 2008년 6월 항쟁을 다룬 만화 <100℃>가 독자들의 사랑을 받았다.
만화로 사회를 벗기는 노골리스트김혜리 <씨네21> 기자는 그의 저서 <진실의 탐닉>에서 '크리에이티브(creative) 리더(leader) 22인'을 소개했는데 최규석에 대해 '만화로 사회를 벗기는 노골리스트'라고 표현했다. 최 작가는 이보다 앞선 2008년에 그의 벗인 연상호, 허지웅과 함께 스스로 '노골리즘'을 선언하기도 했다. 사회가 문제가 있으면, 누구 때문인지 무엇 때문인지를 노골적으로 밝히고 어떻게 변화시킬 수 있는지를 보여줘야 한다는 것이다.
"중·고등학교 국어 시간에 문학예술은 주제를 감춰야 한다고 배운다. 드러나면 유치하다고 하는데,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대문짝만하게 주제를 전면에 내밀어도 재미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지금 우리나라에는 사회문제를 그리는 작가가 사라졌다. 주제가 전면에 드러나는 걸 폐기하고, 사회적인 시선을 집어넣고 싶을 땐 비유나 은유적으로 양념 치듯이 집어넣는다.사회의식은 숨겨져서 없어진다. 대부분의 독자는 이를 눈치채지 못한다. 눈치를 채는 독자들이 있긴 하다. 발견의 기쁨을 누리지만 끝이다. 사회적인 영향력은 행사하지 못한다. <개구쟁이 스머프>나 <미래소년 코난>이 사회주의 공동체나 좌파적인 시선을 담은 작품이라고는 하지만 의식 있는 사람들의 자족적인 발견 외에 작가가 대중적으로 생각을 전달하는 것에는 실패했다고 본다. 주제를 이마에 붙여야 한다고 생각한다."죄책감과 찝찝함 떨치고자 시작한 웹툰 <송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