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구. 경교장에서 찍은 사진.
김종성
이런 개헌 과정을 살펴보면, 1987년 헌법에서 임시정부를 명확히 규정하고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고 선언한 것이 얼마나 획기적인 일인지 짐작할 수 있다. 김구의 임시정부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던 6월 항쟁 주역들의 힘이 아니었다면, 이런 획기적 변화가 나타나지 않았을 것이다.
1987년 헌법을 통해 알 수 있듯이, 대한민국은 1910년에 멸망한 조선왕조의 법통을 계승한 나라가 아니라 1919년에 수립되고 1930년대에 리메이크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 나라다. 이 점은 조선 황족들이 해방 이후에 찬밥 대우를 받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설명해주는 것이다. 이렇게 된 것은 영화 <암살>에서와 같은 일련의 암살 작전을 통해 독립운동에 활력소를 불어넣고 임시정부를 되살린 김구라는 인물의 역할에 힘입은 바가 크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대한민국이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하는 것은 사실은 좀 이상한 일이다. 왜냐하면, 대한민국 정부 수립 과정에서 임시정부는 따돌림을 당했기 때문이다. 미군정이 먼저 주둔한 뒤에 고국 땅을 밟은 임시정부 구성원들은 미군정의 배척을 받았다. 미군정의 훼방 때문에 그들은 공적 자격이 아닌 개인 자격으로 환국할 수밖에 없었다.
그 뒤로도 임시정부 구성원들은 미군정 및 이승만과 대립했다. 그들은 미군정과 이승만이 추구하는 분단정책을 반대했다. 이승만은 한때 임시정부 임시대통령이었지만, 이 시기에는 임시정부의 적이었다. 임시정부 사람들은 미군정과 이승만에 맞서 남북 구분 없는 하나의 정부를 지향했다. 그래서 이들은 대한민국을 구성하는 첫 선거인 1948년 5·10총선에도 불참했다. 38선 이남 혹은 이북만을 지배하는 정부는 민족적 정통성이 없는 정부라고 판단했던 것이다.
이런 사실에서 드러나듯, 대한민국임시정부는 대한민국을 거부한 정부다.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자기 이름을 딴 대한민국이란 나라가 출현했지만, 자기 이름을 딴 대한민국이 자기와 정반대의 길을 걷자 대한민국에 맞서 싸웠다.
대한민국임시정부와 대한민국의 불편한 관계는, 1948년 헌법의 전문에서 임시정부가 명확하게 언급되지 않고 간접적인 방법으로 언급된 이유를 설명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임시정부를 인정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부정할 수도 없는 이승만 진영의 고민이 담겨 있다고 볼 수 있다.
양자의 불편한 관계는 1948년 헌법에서 '대한민국은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계승한다'고 선언하지 않고 '대한민국은 3·1운동의 독립정신을 계승한다'라고 모호하게 선언한 이유를 설명하는 데도 도움이 될 것이다.
임시정부 계승하는 대한민국 헌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