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5일, 투병 중인 곽정숙 전 의원의 모습을 촬영한 사진
곽정숙
곽정숙은 18대 국회의원이다. 한국여성장애인연합 상임대표, 장애인차별금지법제정추진연대 상임공동대표를 역임하였고, 여성장애인 인권 증진에 이바지한 공로로 '오월여성상'을 수상하였다. 2008년 민주노동당 비례대표 1번으로 국회에 입성하였으며 보건복지위원회, 여성위원회 위원으로 '인권복지·보편적 복지로 평등 세상'을 만들겠다는 목표를 가지고 의정활동을 했다.
민주노동당은 5석에 불과한 소수정당이었다. 객관적으로 힘이 없었다. 그런데 의정활동의 성과는 그 힘을 훌쩍 뛰어넘었다. 곽정숙 의원은 임기 4년 동안 총 82건의 법안 제·개정안을 대표 발의하였으며 이 중 22건이 본회의에서 통과되었다.
제정법만 해도 '장애인·고령자 등 주거약자를 위한 지원법' '사회서비스 이용 및 이용권 관리에 관한 법률' '사회복지사 등의 처우 및 지위향상을 위한 법률' '노숙인 등의 복지 및 자립지원에 관한 법률' 등 4건이다. 비록 통과되지는 않았으나 '장애여성지원법'을 발의하여 여성장애인 지원 정책을 공론화한 것도 성과라고 할 수 있다.
또, 중증장애인 근로지원제도 법제화, 외국인 장애인등록 허용, 정신장애인의 직업 활동 보장, 사회복지시설 투명성 확보와 인권보장을 강화하는 데 기여하였다. 19대에는 불출마하였으며 지역에 돌아가 평범한 시민으로 살아가던 중 간암 진단을 받았다.
나는 곽정숙 의원의 보좌관이었다. 비례대표 선거운동을 하던 후보 시절부터 함께 일했다. 4년 임기를 마치고, 고향 광주로 내려갈 때까지 처음부터 끝까지 함께 일했던 보좌진은 내가 유일했다. 4년을 온전히 함께 보냈기에 그 시간이 어떠했는지 가장 잘 알고 있다. 간암이라 했을 때에 심장이 툭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간은 피로하면 악화되는 장기 아닌가.
후보 시절부터 전국 각지의 장애인단체와 만나도록 쉼 없이 일정을 잡았다. 모든 광역시도에 적어도 한 번씩은 방문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임기 시작 이후에는 그보다 몇 배 많은 고된 일정이 있었다. 18대 국회 진보정당 의원들의 의정활동은 촛불집회로 시작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2008년 5월 미국산 소고기 수입 재개 협상에 대해 반대하는 '광우병 소고기 수입 반대 촛불 집회'가 연일 이어졌고, 국회 개원일인 6월 5일에도 어김없이 집회가 있었다. '소고기 장관고시 반대 전면 재협상 추진'을 위한 삼보일배를 하던 중 경찰들이 방패로 막고 밀어붙일 때는 의원이 다칠까 봐 다급한 나머지 나도 모르게 욕설을 쏟아냈다. 체구가 작은 의원이 집회 도중 몸싸움에 밀리는 일은 부지기수였다.
한번은 국회 본회의장 앞 로텐더홀 농성 도중 우르르 몰려든 사람들에 밀려 쓰러져 구급차에 실려 간 적도 있다. 공교롭게도 보좌진들은 다른 장소에서 농성하고 있을 때였다. 보좌관이 아무도 곁에 없는 상황에서 발생한 일이라 놀라기도 했고, 죄책감도 컸다. 다행히 많이 다치진 않았지만,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심장이 쪼그라드는 기분이다.
쌍용자동차 농성에 합류했던 평택의 여름은 어떠했던가. 지독히 더웠다. 내리쬐던 햇볕, 등을 타고 흐르는 땀, 요란한 헬리콥터 소리, 차량 이동이 차단된 텅 빈 도로는 당시에도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천막에서 잠을 자야 했던 날들, 아스팔트 위의 시간. 그곳에 곽정숙 의원이 있었다.
이후 셀 수 없이 많은 기자회견과 집회, 농성, 파업현장 지지방문이 임기 내내 계속되었다. 어느 날, 곽 의원이 "일정을 좀 줄이면 안 되겠나? 힘이 드네" 말하였을 때 나는 조금 화가 났다. 치열하게 싸우는 사람들이 있는데 더 찾아가자고는 못할 망정 일정을 줄이자고 하다니, 진보정당 국회의원이 되었을 때 이 정도 각오도 없었나 싶었다.
아마 비슷한 시기였던 것 같다. 곽 의원이 간염약을 처방받아 먹기 시작한 것이.
"의원 된 지 일 년쯤 되었을 때, 하도 피곤하고, 미열이 있어서 병원에 갔더니 B형 간염 때문이라고 해서 약을 처방받아 먹었지. 비활성이었고, 수치가 낮아서 치료해야 할 정도는 아니었는데, 계속 약을 먹었어, 피곤하면 일 못하니까. 의사가 그게 원인이 된 것 같다고 하더라고. 그때 약을 안 먹었어야 했나 싶네."나는 약을 먹어야 할 정도였는지 전혀 몰랐다. 임기 말에 이르러 서야 간이 안 좋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돌아보면 나는 썩 좋은 참모가 아니었다. 의원의 건강 상태를 살피지 못했다. 사명감에 짓눌려 '의원을 잘 보좌해야 한다'는 보좌관의 기본 책무를 잊었다. 살면서 후회되는 게 하나둘이랴. 지금에야 아무 소용없지만, 생각할수록 후회된다.
곽 의원은 국회의원 임기 중 직접 찍은 사진과 글이 담긴 에세이집과 의정활동보고서를 냈을 뿐 자서전은 출간하지 않았다. 나는 늘 의원의 자서전이 없는 것이 아쉬웠다. 살아온 이야기를 남기는 것은 의미가 있으며 특히 다른 여성장애인들에게 힘이 될 것이라고 권하였다.
"자기 생색내기로 자서전을 남기는 것은 의미가 없어. 그것보다 내가 하는 작은 고백이 바른 정치·선한 정치에 대한 권면이 되면 좋겠네. 내 경험을 듣고 정치를 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많아졌으면 싶네."곽 의원은 여성장애인이 정치하게 된 과정을 통해 정치의 중요성이 전해졌으면 좋겠다고 하였다. 그렇게 인터뷰를 시작했다. 나의 마지막 보좌다.
"5살 때 장애인... 학창시절이 제일 슬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