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남도 금산에 위치한 청풍서원
여경수
이택용 향토사학자는 기행 전날에는 <야은 길재의 삶과 문학>에 관한 강연을 하였다. 야은 길재(1353-1419)는 고려와 조선의 왕조교체기에 목은 이색, 포은 정도전과 더불어 고려의 충신으로 평가된다. 길재는 고려의 충신일뿐 아니라, 조선시대 학자들에게는 문학과 관련해서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
1419년 길재가 죽자 세종은 <충절>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이후 조선시대 유학자들이 왕에게 건의하여 길재의 시호가 <문절>으로 변경되었다. 길재는 구미에서 은둔하면서, 조선시대의 통치철학이자 시대정신인 성리학을 영남 유림들에게 가르쳤다.
유학의 발전사에서 보면 성리학은 사회 윤리인 예(禮)를 강조한다. 성리학은 인간의 심성을 우주의 보편적인 원리에서 해석한다. 이를 통해서 인간의 존엄성을 밝히는 사상이 성리학이다. 성리학은 주자학·정주학·이학·도학·신유학이라고도 부른다. 성리학은 송나라 시대 주희가 집대성했다. 이처럼 이택용 향토사학자는 강연에서 길재의 학맥과 관련된 큰 흐름을 설명했다.
조선시대 영남에서 성리학의 학맥은 야은 길재에서 강호 김숙자(1389~1456)로, 김숙자에서 점필재 김종직(1431~1492)으로, 김종직에서 한훤당 김굉필(1454~1504), 김굉필에서 정암 조광조(1482~1520)로, 조광조에서 회재 이언적(1491~1553)으로, 이언적에서 퇴계 이황(1502~1571)으로 이어진다고, 이택용 향토사학자는 설명해주었다.
구미 출신인 길재에 대한 역사기행을 충남 금산으로 정한 이유가 무엇일까? 기행을 신청하기 전에 궁금했던 부분이었다. 그 이유는 길재의 부친인 길원진이 고려시대인 1383년 금주지사로 부임했기 때문이다. 길재는 부친이 현재의 금산군수격인 아버지를 따라 금산으로 갔다. 금산에서 거주하던 길재는 금산 출신의 아내를 맞이했다. 길재는 금산에서 부친상을 당하고는 금산에 부친의 묘자리를 만들고, 3년 동안 시묘살이를 했다. 길재는 대략 4년여 동안 금산에서 머물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