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시 잠든 사이잠시 잠든 사이, 116.8 x 91cm, acrylic on canvas, 한수희, 2014
한수희
다시 작품을 보자. 많은 작품 중에 위 그림 <잠시 잠든 사이>는 단번에 내 마음을 쾌하게 흡입했다. 흔치 않은 선홍빛 잉어가 황금빛 잉어로 보일 만큼 찬란하다. 녀석은 웃었다. 신이 났다. 수염이 하늘을 달리고 비늘과 꼬리가 펄떡거린다. 펄떡펄떡 튀어 오르며 온몸으로 털어내는 물방울이 검은 밤하늘을 붉은빛으로 만들어 놓았다.
짜디짜고 쓰디쓴 바닷물에 잉어가 살 수 있는가? 아니다. 잉어는 원래 담수에서만 살 수 있는 어종이다. 잔잔한 연못에서 노니는 동양화 속에 한가한 잉어가 아니다. 누가 먹이를 뿌려 주면 받아 먹고, 어느 날 낚시 바늘에 걸려 자신의 운명을 마감하는 그런 잉어가 아니다. 밋밋한 생명 근원을 뛰쳐나와 쓰디쓴 세상인 바다로 거슬러 왔다. 거친 파도가 몸통을 휘감으나 펄떡이는 자유를 더이상 가둘 수 없다. 녀석은 때가 오기까지 침묵했고 사유했다. 주어진 환경에 반항할 줄도 알았다. 밋밋한 담수를 거부하고 짜디짠 바다에서 솟구친다. 이런 잉어를 어떻게 가두며 누가 낚겠는가. 여유 있게 웃는 것이 참으로 쾌하다.
예술이 시대의 철학을 담아서 파장을 일으키는 것이, 담수어인 잉어가 검푸른 밤바다에서 솟구치는 것과 같다. 달빛 받은 선홍빛 비늘이 황금빛으로 느껴지는 것은 다름이고 거부며 반항이다. 그리고 자유다. 수많은 점(點,dot)들이 만들어 낸 공간에서 난 목놓아 울었으나 소리내지 않았다. 할 수 만 있다면 녀석을 가두고 싶다. 세상의 복을 다 불러 올 것만 같은 기운이 넘쳐난다.
한수희 작가는 의도를 가지고 시작하지 않는다 한다. 이것이 더 어려운 작업일 수도 있을 것 같다. 덕분에 보는 이는 작품과 더 깊은 교감이 될 것 같다. 서양화를 전공한 작가에게서 동양적 사유함이 느껴진다. 순박한 얼굴에 콧수염이 제법 어울렸고 유쾌하고 진솔하고 당당하다. 캔버스 위에 점(點,dot)을 찍은 시간만큼이나 내공이 깊어 보인다. 작은 스침에도 배움을 발견해 내는 밝은 눈이 있어서 작가로서 영감은 마르지 않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