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 북한을 방문했을 때 형제들로부터 받은 부모님 회갑 사진. 오매불망 그리던 어머니는 6개월 전에 돌아 가셨고, 아버지 역시 일찍 세상을 떠나시고 없었다. 나는 어려운 일이 생길 때마다 어머님의 얼굴을 떠올리며 마음을 추스렸다.
한도원
나는 온갖 의학서적들과 잡동사니로 뒤섞여 있는 그의 사무실 간이 의자에 앉아서 지난 수 주일 동안 겪었던 북한 탈주 과정을 들려줬다. 그는 놀랍고 안타깝다는 표정을 번갈아 지어 보이며 믿을 수 없다는 듯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가 부드럽고도 진지하게 내 말을 경청하고 있는 것을 알고는 좋은 예감이 들었다. 탈주 과정과 이런저런 우리 집안 소식을 다 들은 그는 아내에게 연락을 해두겠다며 당장 자기 집으로 가서 짐을 풀고 쉬라고 했다.
찾아간 그의 집은 한 눈에 보기에도 굉장한 크기의 저택이었다. 대문을 두드리니 식모인 듯한 여자가 나오더니 무슨 일로 왔느냐고 퉁명스럽게 물었다. 의사 아저씨가 일러줘 찾아왔다는 이야기를 들은 그녀는 금방 부드러운 표정으로 따라오라는 손짓을 했다.
안채에 도달하는 동안 세 개의 문을 거치자 고급스럽고 맵시 있게 옷을 갖춰 입은 여자가 마루 위에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의사 아저씨 부인이었다. 그녀는 반색하며 "아니, 도원이 아니냐?"며 마루 아래로 달려 내려왔다. 목소리를 듣고서야 그녀의 낯이 익어 보였다. 종종 아들 이름을 부르며 우리집 안채를 기웃거리던 그 얼굴이었다.
그녀가 부드럽고 환한 미소로 반갑게 맞이하는 것을 느끼고는 비로소 안도감이 들었다. 그녀는 식모에게 우선 허기를 채우라며 맛깔스러워 보이는 만두를 내오게 했다. 그녀는 평안도 후창 우리집 별채에서 살 때 나의 부모님이 편의를 제공하고 후한 대접을 해줬던 일들을 말하며 안정이 될 때까지 자신의 집에 기거해도 좋다고 했다. 유치원 동무였던 꾀복동이 친구도 나를 반갑게 맞이해 오랜만에 밤을 새워 도란도란 얘기꽃을 피우며 회포를 풀었다.
세 번째 아버지 친구의 집에서 며칠을 푹 쉬며 지내다 보니 지금껏 헤쳐 나온 길들이 아득하기만 했다. 마음이 어느 정도 안정이 돼 아침저녁으로 동네 고샅을 산책하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가슴 설레게 하는 '빅 뉴스'를 접하게 되었다.
경복고등학교에서 편입생을 뽑는다는 소식이었다. 그 당시에 경복고는 전국의 내로라 하는 수재들이 꿈꾸던 학교들 가운데 하나였다. 신문에 난 편입생 모집 공고를 의사 아들 친구에게 보여주며 응시할 뜻을 내비치자, 그는 "농담하지 말라"는 반응을 보였다.
다음날 나는 1시간 이상 걸어서 경복고등학교에 찾아가 응시원서를 접수했다. 편입시험은 그날부터 보름 후에 있을 예정으로 시험과목은 영어였다. 영어 공부라고는 중학교 1, 2학년 때 배운 것이 전부였다. 제법 공부를 잘한다는 칭찬을 집 안팎에서 들으며 중학교를 다니기는 했지만, 심신이 지쳐 있었던 데다 날고 긴다는 전국의 수재들과 견줄 것을 생각하니 겁부터 덜컥 났다.
기왕 던져진 주사위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고심을 거듭하다가 목숨과 바꿀 정도로 위험한 순간에 쓰려고 꼬깃꼬깃 꿍쳐둔 돈이 생각났다. 나는 일단 서울 시내의 영어 학원 단기 코스에 등록하기로 했다. 그리고는 밤낮으로 매달렸다.
어떻게 지냈는지 모르게 시험일이 다가왔다. 시험 당일 아침 고사장에 가보니 20명의 편입생 모집에 전국에서 모여든 수백 명의 학생들로 꽉 차 있었다. 시험은 무사히 잘 치른 것 같았다. 이미 저지른 일이니 하늘에 맡기는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합격자는 일주일 후에 학교 게시판에 공고될 예정이라고 했다.
발표일을 앞두고 내 머릿속은 멋진 교복을 입고 등교하는 모습으로 꽉 차 있어서 밥을 먹는지 걸음을 옮기는지 모를 정도였다. 혹 합격할지도 모르겠다는 가느다란 희망이 생기는가 하면, 금방 말이 안 된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보름 공부해 꿈꾸던 학교 편입시험에 합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