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생사로 가는 길은 낭산 입구 사천왕사터(사진 왼쪽)에서 선덕여왕릉(사진 가운데)을 거쳐, 다시 문무왕 화장터로 추정되는 능지탑을 옆으로 이어진다. 능지탑(사진 오른쪽)을 지나면 인가가 나오고, 그 마을 뒤로 오솔길을 걸으면 중생사가 깊숙한 곳에 혼자 앉아 있다.
정만진
스님들도 모두 도망치고 없는 빈 절에 아기를 놓아둔 채 최은함 가족은 피란을 갔다. 반 달쯤 지난 뒤 중생사로 돌아온 최은함은 놀랍고도 반가움을 감추지 못했다. 아기는 마치 방금 목욕을 시킨 듯 살결이 고왔고, 젖냄새까지 입에서 폴폴 나고 있었다. 이 아기가 뒷날 최승로로 자랐다.
빈 절에 보름 동안 놔둔 아기, 방금 목욕한 듯 말끔해
중생사 보살상 |
1. 중생사의 위치 정식 명칭이 배반 사거리인 경주박물관 네거리에서 남쪽으로 내려가면 금세 남산과 낭산 사이 사천왕사터 삼거리에 닿는다. 여기서 오른쪽으로 들어가면 서출지, 통일전, 남산사터 쌍탑 등을 보게 된다. 배반 사거리와 사천왕사터 삼거리 사이에 낭산으로 난 좁은 길이 있다. 차를 몰고 들어가면 금세 문무왕 화장터로 여겨지는 능지탑이 나온다. 능지탑을 왼쪽에 두고 좌회전하여 들어가면 배반동 640번지 중생사에 닿는다. 이 삼거리의 오른쪽에 선덕여왕릉이 있다.
2. 중생사 보살상의 특징 보물 665호인 중생사 보살상의 본존상은 스님 복장에 두건을 쓰고 있다. 좌우에서 시중을 들고 있는 두 협시 신장들이 무기를 들고 있다. 이런 희귀한 특징 덕분에 미술사적으로 아주 귀한 문화재로 대접을 받는다. 하지만 특히 신장상은 몹시 마모가 심하여 잘 알아보기가 어려울 지경이다. 본존상의 높이는 90㎝이고, 좌우에 조각되어 있는 신장상들도 대략 비슷하다. 비바람을 막기 위해 세워진 누각에 지장전이라는 현판이 붙어 있는 것은 통일신라 시대 작품으로 추정되는 이곳 본존상이 지장보살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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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순왕이 스스로 나라를 들어 왕건에게 항복하던 무렵, 최승로는 열 살 안팎이었다. 최은함은 아들을 데리고 개성으로 이사를 갔다. 최승로가 천재라는 소문이 나자 왕건이 그를 궁궐로 불렀다. 최승로는 왕건 앞에서 논어 등 경전을 줄줄 막힘없이 암송했다.
최승로의 시무 28조는 고려 시대 전체를 통해 정책 제안서 종류 중 유일하게 전문이 <고려사>에 기록되어 있다. 그만큼 최승로는 고려의 초기를 반석에 올려놓는 데 크게 기여한 인물이었다. 그렇다면 부처의 도움으로 이 세상에 태어났고, 또 생명을 유지할 수 있었던 최승로는 자신에게 주어진 권력을 얼마나 부처를 위해 사용했을까?
최승로의 시무책에는 '불교를 억제하고 유교를 일으켜야 한다, 불교의 폐단을 줄여야 한다, 스님들의 횡포를 막아야 한다, 불경과 불상을 사치스럽게 만드는 것을 금지해야 한다, 연등회나 팔관회에 사람과 노역이 동원되는 것을 줄여야 한다' 등 불교 혁파를 주장하는 내용이 많다. 그는 불교 배척, 아니 절과 승려들의 잘못을 바로잡는 데에 앞장섰다. 부처님은 최승로를 세상에 태어나게 하고, 또 전란 중에서도 죽지 않게 해줄 때에 이미 그 사실까지 익히 알고 있었던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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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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