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림사 맞은편 도덕산 정상부에 있는 도덕암에는 고려 광종이 물을 마신 어정수가 있고,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모과나무도 있다.
정만진
하지만 '사냥이 끝나면 사냥개를 잡아먹는' 일이 신라 신문왕 대에만 일어났을까. 고려 광종 역시 통일 과정에 공을 세운 호족들이 왕권에 도전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권력 상층부를 형성하고 있던 준홍, 왕동 등은 물론 개국공신인 박수경, 최지몽 등도 제거했지만, 심지어 이복 형이자 2대, 3대 임금을 역임한 혜종과 정종의 아들들까지 목숨을 빼앗았다.
광종은 호족들의 권력을 제압하기 위한 정책도 펼쳤다. 호족들이 후삼국 전쟁 중에 부당하게 노비로 삼은 경우를 조사하여 풀어주게 하고, 다시 그런 일이 일어나지 못하도록 막는 법을 제정했다. 이를 노비안검법(奴婢按檢法)이라 한다.
광종은 과거도 실시했다. 이 역시 호족 자제들이 높은 벼슬자리에 임의로 오르는 것을 막음으로써 호족들의 세력을 억제하기 위한 장치였다. 광종의 과거 실시는, 실효를 거두지는 못한 신라 원성왕 때의 독서삼품과와 달리, 실력 있는 사람이면 널리 관직에 등용되는 문을 열었다는 점에서 새로운 시대의 개막을 알리는 상징이었다. 물론 광종의 개혁 추진에는 거란과의 대결 과정에서 축적한 군사력이 든든한 뒷받침이 되었다.
광종 유적, 송림사 앞 도덕암의 어정수 대구경북에는 고려 초기 유적이 별로 없다. 왕건이 견훤에게 대패한 지점인 팔공산 아래 지묘동의 신숭겸 유적지, 대구 앞산 정상부 턱밑의 왕굴, 안동 시내 중심가의 삼태사, 의성읍 의성여고 뒤 깊숙한 계곡에 있는 홍술비 등 손가락에 꼽을 정도뿐이다. 물론 왕건이 개성 출신이고, 고려의 서울 역시 개성으로 대구경북과 지리적으로 아주 멀었기 때문에 당연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