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건은 경애왕을 죽인 뒤 귀환하는 견훤과 대구 팔공산 아래 지묘동 일원에서 대회전을 치른다. 지금 그 일대는 신숭겸 장군 유적지(대구시 기념물 1호)로 지정되어 있다. 사진은 왼쪽부터, 신숭겸 동상, 유허비, 독좌암(왕건이 대패 후 도망치면서 넋을 잃고 혼자 앉아 있었다는 바위).
정만진
포석정 및 경애왕릉과 견주어 조금도 모자라지 않는 후삼국 유적은 대구 팔공산 아래 지묘동 일대의 신숭겸 장군 유적지이다. 이곳은 대구시 기념물 1호로 지정되어 있다. 왕건은 이곳에서 견훤을 기다리고 있다가 대회전을 치른다. 하지만 고을부(경북 영천)를 거쳐 서라벌(경주)을 기습, 경애왕을 죽이고 돌아오던 견훤군은 기세가 등등했고, 왕건은 간신히 목숨을 부지한다.
본래 후백제와 고려의 전쟁 초반은 견훤이 우세했다. 927년 팔공산에서 벌어진 공산 전투에서 신숭겸이 임금 옷을 입고 적을 속이는 동안 왕건이 구사일생으로 도망칠 만큼 견훤이 대승을 거둔 것도 전력의 차이가 낳은 결과였다. 하지만 왕건은 930년 고창(안동) 전투의 대승으로 전국 판도를 뒤집은 후, 936년 사실상의 마지막 결전인 일리천(선산) 전투에서 견훤의 장남 신검을 대파하고, 기세를 몰아 후삼국 통일의 위업을 달성한다.
팔공산에 남은 후삼국의 자취, 신숭겸 유적지 왕건은 신라에 우호적이었다. 신라인들은 왕건에게 호응했다. 935년 신라는 스스로 고려에 항복했다. 왕건은 유력 호족들에게 왕(王)씨 성을 쓰게 하고, 높은 벼슬도 주고, 무려 29명의 호족 딸과 결혼했다. 게다가 왕건은 본인이 호족 출신이었으므로 궁예나 견훤보다 호족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데 유리했다. 세금도 궁예의 2/3만 거두었다. 그렇게 하여 왕건은 후삼국을 통일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