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멀리 빨간 등대, 하얀 등대가 보이고 해변가엔 친구 두 명이 바다에 발을 담그고 놀고 있다.
황보름
이호테우 해변의 백사장 길이는 약 250m, 폭은 120m 정도이다. 바다랑 장난도 치면서 천천히 걸으면 해변 끝에서 끝까지 10분 정도면 걸을 수 있는 길이이다. 그리 크지도 그렇다고 너무 작지도 않은 해변이었다. 그런데 날씨 탓일까. 아니면 시간 탓일까. 해변을 즐기고 있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친구 두 명이 바다에 발을 적시며 깔깔 웃어대는 것 외엔 나처럼 몇 명 그저 바다를 바라보는 사람들뿐이었다.
바다만 찍고 싶은데 자꾸 모래산이 카메라 앵글에 잡힌다. 모래를 파내고 있는 건지, 아니면 어디서 모래를 가지고 온 건지 감이 오지 않는다. 다만 지금 다시 모래 산 사진을 보니 왠지 모래 산이 아닌 모래 무덤 같다는 생각이 든다. 이호테우해변 앞에 놓인 슬픈 운명을 알게 되었기 때문일까.
이호테우해변은 조만간 그 모습이 달라질 예정이다. 제주도 개발 바람이 이곳까지 치고 들어와 버렸단다. 이호테우해변을 포함한 이호1동 일대의 부지가 몇 년 전 중국 자본에 넘어가 버렸다. 중국 자본이 이곳에 세우고 싶어하는 것은 카지노 시설이다. 제주도의 한 아름다운 해변이 카지노의 지배 아래 놓이게 된 것이다.
세계 최고의 관광지 중 한 곳인 제주가 관광객을 마다할 일이 무얼까. 중국인 관광객이 제주를 사랑한다면 이는 매우 좋은 일일 것이다. 실제로 내가 제주 여행 중 만난 모든 중국인은 제주를 매우 좋아했다. 제주가 아름답다는 이유에서였다. 하지만 중국 자본이 제주를 잠식하는 일은 중국인이 제주를 좋아해 여행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일이다. 우리는 제주의 모습이 아름다워 그간 제주를 찾았다. 그런데 그 제주 본연의 모습이 점점 사라지고 있다. 아름다움을 잃어가고 있다. 자본의 끝없는 욕심 때문이다.
사실 지금의 이호테우해변을 걸으며 카지노를 떠올리긴 불가능하다. 흔한 커피숍 하나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해변은 아직 테우가 바다 위를 떠다니던 그때 그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다. 해안가에 늘어서 있는 민박집과 가정집들도 제주 일반 해안가의 모습과 다르지 않았다. 개발이 본격적으로 시동을 걸면 과연 이 모습들이 얼마나 달라질지 벌써 가슴이 아려온다.
검은색 모래를 밟으며 오래도록 해변을 왔다 갔다 했다. 오늘은 다른 계획이 없었으므로 한참을 이곳에 더 있어도 됐다. 그렇게 계속 있자니 사람들이 점점 몰려온다. 유치원에서 온 수십 명의 노랗고 파란 아이들이 모래를 만지며 신나게 뛰어다녔다. 한 아빠는 힘들게 모래 산을 오르며 아래에서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는 자그마한 아들에게 뭐라고 뭐라고 말을 했고, 그러자 아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계속 아빠가 오르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사람들이 해변을 즐기는 모습을 나는 그냥 바라보고 있었다. 모래에 새겨진 발자국도 그냥 바라보고 있었다. 바다 저 너머에 있는 쌍둥이 등대도, 모래를 간질이고 있는 바다의 포말도, 유치원 아이들도, 아빠와 아들도, 그리고 내가 하는 생각도 조용히 그냥 바라보고 있었다. 그렇게 바라보고 있으니 내가 정말 혼자 여행을 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바라보고 있는 것들이 오롯이 내게 담겨지는 느낌이었다. 이렇게 천천히 어떤 목적 없이 하나의 물체를, 사람을, 생각을 바라봤던 게 언제인지도 기억나지 않는다. 그간 뭐가 그리 바빴다고 이런 시간 하나 가지지 못했던 걸까.
하지만 지금은 바쁠 일도 없다. 이야기를 나눌 사람도 없다. 시간도 많다. 거기다 나는 혼자다. 해변가에서 혼자서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란 그저 바라보는 것뿐이지 않을까. 천천히, 목적 없이, 하나의 물체를, 사람을, 생각을.
주변을 둘러보던 나는 해변에 앉아 내가 하는 생각을 바라보았다. 나는 한참 싱클레어를 생각하던 중이었다. <데미안>의 싱클레어를. 나이 든 나는 어린 싱클레어가 자기 자신을 찾기 위해 떠났던 여행을 떠올렸다. 그에게 여행이란 삶 그 자체였었지. 삶을 살며 싱클레어는 얼마나 애타게 자기 자신을 찾아 헤맸던가. 자기 내면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던가. 뚜렷하고 확고한 개인이 되기 위해 싱클레어는 데미안을 좇고 또 좇았었다. 그리고 결국, 자신을 찾아낼 수 있었지.
싱클레어가 자기 자신을 찾아내는 과정은 멀고도 험했다. 그러니, 그런 험한 과정을 겪지 않은 내가 나를 잘 모르겠다 생각하게 되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당연한 일이라고 그냥 치부하긴 싫었다. 조금이라도 더 나를 알고 싶었다. 진짜 나를 찾고 싶었다. 그래서 나는 혼자 여행을 하고 싶었던 것 같다. 그래, 나는 나를 알고 싶어 여행을 시작한 거였다. 나를 잘 알게 된다면, 그렇게 된다면, 조금 더 용기 있게 삶을 살아나갈 수 있게 되리라 기대했던 거였다.
오늘은 이렇게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설렁설렁. 그게 무엇이든 그것을 바라보면서. 혼자 하는 여행의 가장 좋은 점이 바로 이것이다. 마음 가는 대로 모든 할 수 있다는 것. 이 크지도 작지도 않은 해변에서 몇 시간을 죽치고 앉아 있을 수 있다는 것. 그런데도 아무도 재촉하지 않는다는 것, 혼자 있어서 가능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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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생처음 킥복싱>, <매일 읽겠습니다>를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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