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껏 책을 읽고 글을 쓰기위해 국제기구 최고의 자리를 내려놓았습니다. 아~ 그분이 풀어놓을 산더미 같은 경험과 보석같은 지혜들을 어찌하고 이렇게 서둘러 세상을 떠나셨는지...
이안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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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산지구분이 그렇게 어려운 문제인가요?"제가 질문 드려볼게요. 생선의 원산지에 관해서요. 12해리 영해 내에서 고기를 잡으면 어느 국가의 생선입니까? 200해리 배타적 경제수역에서 잡힌 생선의 원산지는 어떻게 될까요? 그럼 공해에서 잡힌 생선은? 어선의 국기는 모두 달라요. 원산지는 어떻게 표기되어야 하나요? 호주에서 태어난 소를 수입해서 한국에서 6개월 키웠습니다. 원산지는? 미국의 대형 도축장에서 멕시코와 캐나다에서 수입한 소를 도축했습니다. 원산지를 어디로 해야 할까요?
미국에서 중남미와 아프리카에서 생산된 원두를 수입해서 여러 나라의 원두를 섞어서 블렌딩(혼합)한 다음 로스팅했습니다. 커피의 맛과 향은 커피 종과 생산지뿐만 아니라 블렌딩 비율, 로스팅 방법에 따라 현저하게 달라집니다. 더구나 각 회사의 커피는 코카콜라가 제조 원료를 비밀에 부치는 것처럼 블렌딩 비율을 일급비밀로 부칩니다. 원산지는 어디가 되어야 하나요?"
-쉽지 않은 문제인데요."더구나 원사진표기는 해당 국가의 경제적 이해득실과 소비자의 건강에 지대한 영향을 미칩니다."
작년 9월 초, 저는 모티프 원에서 24년간의 유럽생활을 마치고 귀국한 한 작가와 대면했습니다.
김의기, 그분은 WCO(세계관세기구)에서 3년, WTO(세계무역기구)에서 19년간의 근무를 마치고 귀국했었습니다. 국제무대에서는 'Eki Kim'으로 알려졌었습니다. 국제기구에 진출해서 뛰어난 전문성을 발휘한 우리나라의 첫 세대였습니다.
김의기씨는 WTO에서 전문직 직원이 도달할 수 있는 최고 등급인 10등급 선임 참사관(senior counselor)으로 원산지와 관세평가분야에서 세계가 인정한 최고 전문가였습니다. 1975년 제18회 행정고시에 합격한 다음 WCO의 관세평가 담당관 및 제네바 한국대표부 재무관보로 국제기구로 진출한 다음 2013년 WTO 참사관으로 은퇴할 때까지 그의 경력 대부분을 유럽에서 보냈습니다.
-WTO의 정년은 언제입니까?"1995년 한국대표부 재무관보로 일하다가 WTO에 지원했습니다. 다행히 직원으로 채용되었습니다. 입사 후 5년이 지난 후, 영구 계약을 체결하였습니다. 제가 62세가 되는 2015년까지 근무할 수 있게 되었지요. 하지만 지금은 은퇴 나이가 65세까지 연장되어서 2018년까지 근무할 수 있지요."
-그런데 왜 조기 은퇴를 하신 겁니까?"제 애인과 함께 살기 위해서요."
-애인이라면?"책을 읽고 책을 쓰는 것입니다. 저는 천성적으로 독서를 좋아했습니다. 수험생 시절에도 입시공부 대신 독서에 빠져 지냈습니다. 덕분에 재수했지요. 이동 중에도, 출장지에서도, 휴가지에서도 스위스의 설산을 내려 보면서 책을 읽었지요. 제게 싫증 나지 않는 애인은 책이더라고요. WTO에서도 독서 모임(Book club)의 구성원으로도 활동했습니다. 문화와 문명권이 각기 다른 그 구성원들과 같은 책을 읽고 토론을 하다 보면 각 나라의 인식 차이를 확연히 느낄 수 있어요. 저는 치열한 협상으로 보낸 시간을 접고 좀 더 일찍 제 애인과 함께 여생을 함께하고 싶었습니다."
김의기씨는 너무 일찍 한국을 떠난 첫째 자녀와 유럽에서 태어난 둘째가 한국적응이 쉽지 않을 것을 염려하여 아이들과 부인을 스위스에 남겨두고 홀로 귀국하여 그의 애인, 책과 동행하는 삶을 시작했습니다. 그분과의 첫 만남에서도 계속될 애인과의 동행에 일에 얼마나 설레고 있는지 금방 알 수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