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림군을 통해 한나라의 부흥을 이끌어낸 광무제 유수를 기념해 친필어제를 내린 건륭제. 승덕(옛 열하)에 있는 피서산장에서
최종명
서한 말년에 왕광(王匡), 왕봉(王鳳)은 녹림산(綠林山)에서 농민을 규합해 반란을 일으켰다. 이후 '녹림' 또는 '녹림호한'은 산속에 은거하며 관청에 항거하거나 재물을 약탈하는 사람들을 부르는 일반명사가 됐다. 1925년 북양(군벌)정부의 교육부 관리 유백소(劉百昭)와 일부 관변 평론가들은 여자사범대학생들의 정치투쟁을 지지하던 교원들을 '토비(土匪)', '학비(學匪)'라고 매도했는데, 이에 작자는 자신의 서재를 비꼬는 투로 '녹림서옥'이라 기재했다.
20세기 문학가 노신(魯迅)의 <화개집(華蓋集)> '화개집속편' 머리말인 제기(題記) 중 '1925년 12월 31일 밤, 녹림서옥 동쪽 벽 밑에서 쓰다'라는 말에 나오는 '녹림서옥'에 대한 주석이다. 녹림산에서의 민란이 서기 17년이니 거의 1900년이나 지나 '토비'보다 다소 그럴 듯한 '학비'까지 들먹이는 것에 대한 통렬한 조롱이었다. 민란을 대표하는 말로 녹림의 파괴력을 드러내는 멋진 말이 아닌가?
호북 형문(荊門)에 있는 대홍산(大洪山)이 1988년 장가계와 구채구와 함께 국가급 풍경구로 비준됐다. 계곡, 표류, 온천, 동굴, 불교성지로 유명하지만 무엇보다 갈대로 휩싸인 해발 1,488m 고원에 위치한 녹림채가 있어 그 어떤 명승지보다 유명하다. 도대체 녹림산의 산채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던 것인가?
왕망의 신나라가 이상정치를 열심히 시술하고 있었지만 농민이건 평민이건 먹고 사는 일이 날로 힘들어 갔다. 흉노와의 변방 전쟁으로 국력 낭비가 심해 전반적으로 GDP 수준은 극악해졌으니 왕망은 왕창 망하기 일촉즉발이었다. 더구나 남방 지역은 자연재해와 흉년의 연속이었고 안타깝게도 인육까지 입에 대는 인상식(人相食) 사례도 빈번했다고 <후한서(後漢書)>가 기록한 걸 보면 참혹했던 실상이 피부로 느껴진다.
놀랍게도 중국 역사에서 식인에 관한 근거 자료는 생각보다 많다. <장자(莊子)>에 당당히 등장해 공자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던 고대 최고의 민란 두목이자 도적인 도척(盗跖)은 사람의 내장을 먹었다고 전해진다. <한서>를 시작으로 중국 24사에 어김없이 등장하는데 20세기에 이르러서도 노신의 소설 <광인일기(狂人日記)>에 나오는 홀인(吃人)은 식인의 뜻이기도 하다.
서기 17년 강하(江夏) 군 신시(新市, 지금의 경산京山) 일대에 흉년이 들어 황량했다. 농민들은 어쩔 수 없이 산과 들에 나가 냉이를 캐먹었지만 풀조차 말라버리자 사람들은 서로 먹자고 싸우고 무법천지가 되기 일쑤였다. 이때 늘 사람들의 고충을 들어주고 근심을 해소해주며 명망이 두터웠던 왕광은 아수라장에서도 사태를 잘 해결해주고 있었다.
자연스럽게 왕광은 인자한 왕봉과 함께 점점 폭도로 변해가는 사람들의 우두머리로 나서게 됐다. 기근은 흉흉한 인심을 낳고 대책 없이 소모적인 감정 싸움만 깊게 하는데 왕광과 왕봉은 사람들의 마음을 다잡으면서 모두 다 살아남을 방안을 강구했다. 유일한 솔루션은 곧 지방 관청에 대한 공격, 그리고 약탈의 시작이었다.
<후한서> '유현전(劉玄傳)'에 따르면 처음에 수백 명으로 시작한 약탈은 왕광이 농민들을 이끌고 녹림산으로 들어가 요새를 쌓고 비적이 됐다는 소문이 퍼지자 몇 달 만에 7~8천 여명이 따라 들어와 곧 무장 군대로 발전했다. 이렇게 신시 지방에서 모인 군대는 녹림군으로 불리며 역사에 당당하게 등장했다.
녹림군의 위세가 날로 커져가자 4년 후인 21년 2월에 왕망의 명령을 받은 형주목(荆州牧)은 2만 명의 진압군을 동원했다. 토벌군의 이동을 간파한 왕광과 왕봉 등 지휘부는 잠복해 있다가 토벌군이 경내로 들어오자마자 습격해 수천 명을 살해하고 군수물자를 모두 빼앗았다. 녹림군 장군 마무(馬武)가 후퇴하는 군대 앞에 갑자기 나타나자 형주목은 혼비백산 마치를 몰고 달아났다. 마차를 쫓아간 마무의 긴 창이 문짝을 내리치자 마차와 함께 형주목이 나뒹구는 사이 단칼에 말부터 베버리는 동안 간발의 차이로 가까스로 목숨만 건져 허겁지겁 도망쳤다. 대승을 거두자 마무의 영웅담은 하늘을 찔렀다.
녹림군은 2만 명의 정부군을 격퇴한 여세를 몰아 경릉(竟陵, 호북 천문天門 시)과 현성이 있는 운사(雲杜, 경산京山 현)를 공격했는데 위세가 황제 부럽지 않을 정도였다. 녹림군이 약탈을 마치고 산채로 돌아올 때 수만 명이 뒤를 따랐다.
17년 9월, 토벌군과 일전을 치른 지 얼마 지나지 않아 5만 명이나 함께 거주하는 산채에 돌연 전염병이 돌아 병사하는 사람들이 급속하게 늘어갔다. 왕광 등 지도부는 산에서 돌림병으로 모두 죽느니 하산해 출정하기로 결정하고 군대를 둘로 나누었다. 왕상(王常)과 성단(成丹)이 통솔하는 하강병(下江兵, 강릉江陵 지역에서 활동) 부대는 서남쪽 남부(南郡, 강릉) 방향으로 움직였으며 왕광, 왕봉, 마무가 통솔하는 신시병은 북쪽 남양(南陽)으로 출병했다. 녹림군이 산에서 내려와 조직적으로 움직이자 나라는 점점 혼란에 빠져 들었으며 전국으로 퍼진 소문은 일파만파로 또 다른 민란으로 이어졌다.
차츰 세력을 넓혀 나가던 21년 7월, 신시병 부대가 평림촌(平林村, 수주随州 시)까지 진군하자 진목(陳牧)과 료심(廖諶)이 통솔하는 수천 명의 평림병이 반란에 호응해 합류했다. 이때 한나라의 황실의 파락호이자 귀족 출신으로 2년 후 녹림군에 의해 경시제(更始帝)로 추인되는 유현이 단신으로 평림병에 투신했다. 북상하던 10월, 용릉(舂陵, 조양棗陽 시)에 이르러 지방호족 유인(劉縯)과 유수(劉秀)도 녹림군에 합류했다. 용릉병을 통솔하는 유연은 왕망의 신나라에 반대해 거병했다. 한고조 유방의 9대손으로 거병 후 세력이 미미했던 유인 부대는 녹림군의 확산을 눈 여겨 보고 합류를 요청했다. 유인의 인척 동생인 유수는 신나라의 종말 후 동한을 세운 광무제가 되는데 당시만 해도 말조차 타 본 적 없고 유약했던 유수가 녹림군 민란의 와중에 천자가 될 줄이야 아무도 몰랐다.
민란 양상이 확산되자 각 지역 농민들은 물론 지방호족도 분기탱천(憤氣撐天) 일어나 전국적 민란으로 고조되기 시작했다. 신시병, 평림병, 용릉병을 통합 부대는 북상을 서둘러 신야(新野)를 점령했으며 12월 마지막 날에는 하강병까지 합류해 군수물자 주둔지인 남향(藍鄉, 신야 현)을 야습, 주둔군 장군을 포함해 2만여 명을 섬멸했다. 22년 새해가 되자 남향이 함락됐다는 소식을 접하고 공격해오는 수만 명의 토벌군을 육양(淯陽, 하남 남양南陽 부근)에서 조우해 단번에 참패시켰다. 녹림군은 여세를 몰아 완성(宛城, 하남 남양)을 공략하자 대부분의 토벌군이 투항했다.
서남쪽으로 출병한 하강병도 형주를 점령했으며 파죽지세로 북상한 3개 부대 연합군도 수십만 명에 이를 정도로 군세가 커졌다. 왕광을 비롯한 각 부대 지도자들은 어느덧 황족인 유씨 일가 중에서 황제를 세워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애초에 굶어 죽지 않으려고 모였던 농민들은 이미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규모가 커진 민란의 합법적인 명분을 세워야 했으니 신나라 황제를 몰아내는 건국을 목표로 전진하는 길만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