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경실상사 보광전 처마 밑에 달린 풍경이 애처롭게 울어댄다.
정도길
최근에 지은 듯한, 약사전. 이 건물 안에도 귀한 보물이 여행자를 기다리고 있다. 보물 제41호 '남원 실상사 철조여래좌상'이다. 통일신라 말기에는 여러 선종 사찰에서 쇠를 녹여 많은 불상을 만들었다. 이 불상은 그 중에서도 가장 오래된 것으로 높이가 2.69m로, 좌불상으로는 큰 편에 속한다. 무릎 아래는 복원하고, 깨어진 두 손도 근래에 찾아 원형대로 복원했다. 이 불상은 온화한 미소를 띤 불상과는 달리 근엄하고 강직한 모습이 인상적이다. 앞 시대와 다른 불상의 변천 과정을 알 수 있는 귀중한 불상으로 평가 받고 있다.
처마 밑 허공에 달린 풍경이 운다. 바람이 때려 잠을 깨운 탓이다. 날짐승 한 마리가 지리산 꼭대기로 바삐 날아간다. 게으른 몸을 일으키고 나태한 정신을 일깨우는 풍경소리에 나도 깜짝 놀랐다. 정진하라는 신호다. 주 법당인 보광전 부처님 앞에 무릎 꿇어 조아린다. 삼배하고 경전을 폈다. 염주 알 하나 돌리고 부처님께 엎드린다. 108배로 이어졌다.
이날따라 108기도를 하는 불자들이 여럿이다. 제각각 다른 사연을 안았으리라. 어떤 이는 묻는다. "108배를 하면 좋으냐"고. 물론, "기도하는 시간만큼은 당연히 좋다"라고 답한다. 마음을 내려놓을 수 있어 좋고, 한 가지 생각에만 몰두한다는 것이 좋다. 힘든 것에 인내함을 배워서 좋고, 지은 죄에 참회하고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이 좋다. 정신적으로 좋은 점 이외에도 육체적으로 운동이 돼 건강에도 좋음은 물론이다. 불자라면 집에서도 정신 수양과 육신의 건강 유지를 위해 108기도로서 정진하는 것도 좋으리라.
실상사는 호국 사찰로도 잘 알려져 있고 일본과 얽힌 설화가 많다. 실상사는 정유재란 때 왜구에 의해 전소됐다는 설도 있다. 약사전의 약사여래불은 천왕봉을 정면으로 바라보는데, 천왕봉과 일본 후지산이 일직선상에 놓여 있다고 한다. "일본이 흥하면 실상사가 망하고, 일본이 망하면 실상사가 흥한다"는 구전도 있다. 보광전에 있는 범종에는 일본 열도의 지도가 그려져 있는데, 예불할 때 스님들이 이곳을 두드린다. 이 때문에 일본 지도 중 홋카이도와 규슈 지방만 제 모양으로 남았을 뿐, 나머지 열도는 희미해져 가고 있다는 것.
전설인지, 속설인지가 중요하지가 않다. 국내 문제로는 독도 영유권과 위안부 해결 문제, 국제적으로는 동아시아 침략과 세계 평화를 깬 전쟁에 대해 입을 다문 일본이다. 진정한 참회가 필요하고, 솔직함이 묻어나는 사과가 필요한 일본이다. 범종에 그려진 일본 지도가 스님이 치는 당목(종이나 징을 치는 나무 막대)에 지워지기 보다는, 범종의 울림소리에 귀를 열고 진중하게 들어야 하는 것이 우선이다. 깨우침의 범종소리가 일본 열도를 울려 퍼져 나가기를 기도해야겠다.
일기예보대로 늦은 오후 비가 내린다. 지인의 소개로 스님과 대화를 나누는데, 훼방꾼인 소낙비로 일찍 자리를 떠야만 했다. 실상사에는 귀중한 보물이 많고, 숨어 있는 비밀도 많다. <108산사순례> 그 스물여섯 번째 사찰 여행. 26번 째 꿰는 염주 알은 남원 실상사의 보물과 비밀을 함께 담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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