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 고향 평북 후창(지금의 자강도 김형직군)에서 평양을 거쳐 해주로 이동한 후 천신만고 끝에 황해 바다를 건너 남쪽땅에 안착했다.
김명곤
해주로부터 우리를 안내하고 숙박을 시켜주며 돈을 챙기고, 북한 경비병들과 짜고 다시 돈을 털어내 챙겼을 안내원 남자를 생각하니 분노가 치밀었다. 북한 경비병들과 사기꾼 안내원 남자도 사라진 상황에서 한동안 우리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자리에 주저앉아 있었다. 누군가가 "총격을 당하거나 노동교화소에 끌려간 것도 아니니 천행아닙네까. 뱃턱이 그리 멀지 않은 것 같으니 죽기살기로 가봅시다래!" 하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심전심이었다.
덜덜 떨며 야밤 고깃배에 오르다 두려움 반 기대 반으로 우리는 북한 경비병들이 가리켜 준 방향으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한 차례 위기를 겪었으니 뭔가 행운이 올 것이란 억지 기대감으로 우리는 숲속으로 난 길을 한참 헤쳐나갔다. 한 시간쯤 걸어가자 비릿한 갯내음이 콧속으로 느껴져 왔다. 30여 분쯤 더 가자 드디어 달빛에 반사된 바다 물결이 춤을 추고 있는 광경이 우리 눈앞에 펼쳐졌다. 구불구불 곡선을 그리며 후미진 곳에 수십 척의 소형 고깃배가 아무렇게나 매어져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 왔고, 좀 더 멀리 바다 쪽 깊은 곳으로 제법 큰 고깃배들이 정박해 있었다.
우리가 바닷가로 가까이 다가가자 인기척이 들리더니 한 남자가 나타났다. 우리는 여차하면 도망갈 채비를 한 채 조심스럽게 그에게 접근했다. 내 친구 백군을 비롯한 탈출자들이 불과 사흘 전에 이곳에서 당한 일을 생각하니 뒤꽁무니에서 금방이라도 북한 경비원이 총을 들고 나타날 것만 같았다. 이번에야 말로 행운이 따라주기를 마음 속으로 기도했다. 남자는 조용히 따라오라는 듯 손바닥을 아래로 향한 채 손짓을 하며 잰걸음으로 배들이 매어져 있는 쪽을 향했다.
완만한 모래사장이 끝나고 50여 미터쯤 떨어져 있는 곳에 우리가 탈 배가 매어져 있었다. 우리는 가지고 있던 짐을 두 손으로 잡아 머리 위로 쳐들고는 물속으로 들어갔다. 한여름 바닷물인데도 상당히 차가웠다. 물이 목에까지 차오를 정도로 깊은 곳까지 가서야 겨우 배 앞에 도달했다. 짐을 던져 넣고 하나씩 차례로 올라타자 남자는 익숙한 솜씨로 노를 젓기 시작했다. 해안을 둘러싸고 있는 숲 속에서 꿩인지 매인지 모를 새들이 푸더덕 소리를 내며 날아가는 바람에 모두가 가슴을 쓸어내렸다.
남자는 모래사장이 끝나는 지점에서 150미터 쯤 떨어져 정박되어 있는 동력선이 있는 쪽으로 조심스럽게 노를 저어 다가갔다. 황해 바다를 건너 남쪽으로 여러 시간을 가기 위해서는 제법 규모가 있는 동력선으로 바꿔타야만 했던 것이다. 남자가 동력선에 배를 바짝 대고는 갑판에 서 있던 남자에게 밧줄을 던져 붙들어 매게 했다. 이윽고 우리는 기우뚱거리는 고깃배에서 동력선에 한쪽 발을 걸치고는 조심스레 올라탔다. 배에 오르니 갑자기 온몸에 오한이 밀려왔다. 물에 빠진 생쥐꼴을 하고있는 우리에게 오밤중 바닷바람은 한겨울 칼바람 처럼 매서웠다.
갑판에서 우리를 기다리던 남자가 어서 가라는 듯 등을 떠밀며 배 아래쪽 짐칸으로 안내했다. 조심스레 사다리를 타고 좁다란 통로로 내려가자 퀴퀴한 냄새가 확 풍겨져 오며 인기척이 느껴졌다. 그곳에는 이미 10여 명의 다른 탈출자들이 웅크리고 앉아서 우리가 내려오고 있는 것을 불안한 기색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선장인 듯한 남자가 주변에 경비선이 돌고 있으니 찍소리 말고 가만히 있으라며 단단히 주의를 주었다. 바닷가에는 크고 작은 배들이 떠 있었고, 일정한 시간을 두고 경비선이 순찰을 돌고 있는 듯했다.
몇 분이 지나자 우리를 태운 동력선이 소리를 작게 죽인 채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짐칸 통로 위로 휘영청 밝은 달이 보석 같은 빛을 발하며 떠 있었다. 천근만근 무거워진 몸을 벽에 기댔다. 이제 드디어 남쪽으로 향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며 스르륵 눈이 감겨왔다. 잠시 걱정스런 모습을 하고있는 어머니의 모습이 보이더니 시커먼 턱수염을 한 로스케들이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나타나기도 했고, 친구 백군이 혼비백산하여 어디론가 허겁지겁 달려가는 장면도 나타났다.
"남쪽 땅입니다, 여러분은 이제 살았습니다!" 얼마쯤 지났을까. 갑자기 배 밑창에서 스크루가 돌아가는 소리가 심하게 들리더니 배가 이러저리 방향을 트는 느낌에 잠을 깼다. 그러더니 갑판 위에서 짐칸 아래쪽 통로를 타고 선장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 왔습니다. 여기는 남쪽 땅입니다. 여러분은 이제 살았습니다. 하나씩 위로 올라오세요!"그곳이 정확히 어디인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드디어 우리는 남쪽 땅에 도착한 것이다. 여기저기 결리고 쑤시던 온몸에 아연 생기가 돌았다. 지나온 날들이 꿈만 같았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하나님 감사합니다, 조상님 감사합니다." 소리가 절로 나왔다. 우리는 누구랄 것도 없이 서로의 손을 잡고 기쁨의 눈물을 글썽였다.
하선을 하기 위해 갑판 위에 오르자 바닷가 저편에서 먼동이 트고 있었다. 나는 그때의 상쾌한 바닷바람을 평생 잊지 못한다. 배낭을 어깨에 멜 틈도 없이 끈을 움켜쥐고는 한걸음에 배에서 내려와 건너온 황해 바다를 잠시 바라다보았다. 압록강변 우리 마을을 떠나올 때 막막하기만 했던 여행, 해주 산간 오두막을 떠나 산중에서 북한 경비병을 만났을 때 눈앞이 캄캄하기만 했던 여행, 그리고 불과 몇 시간 전 해주 어촌 모래사장에서 오금을 저리며 덜덜 떨리는 발걸음으로 고깃배에 올랐던 '위험한 여행'을 끝내고 삼팔선 남쪽 땅 바닷가에 선 것이다.
그러나 내 앞에는 또 다른 여행이 기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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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 안내원 계략에 속아 알거지... 드디어 남쪽땅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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