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산시 옥구읍 수산리에서 농사 지으면서 떡을 만들고 있는 두병훈씨.
매거진군산 진정석
"What's the purpose of your visit?(방문 목적이 무엇인가요?)""…. Travel.(여행)"
2003년 3월 미국 LA 공항. 열일곱 살 병훈은 "여행"이라는 말만 되풀이했다. 그는 입국 과정에서 문제가 발생한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잡혀갔다. 한국말을 할 줄 알던 한 직원, 병훈에게 비자를 보여 달라고 했다. 병훈은 한국의 미 대사관에서 발급받은 F1비자(학생 비자)를 꺼냈다. 입국심사원에게 내밀며 "공부"라고 했으면 통과됐을 비자, 담당자는 왜 안 보여줬냐고 물었다.
"대사관에서 저보고 미국 공항 도착할 때까지 절대 열지 말라고 했거든요. 'Do not open'이라고 적혀 있잖아요." 병훈의 집은 유학원을 통해서 아이를 미국에 보낼 만큼 부자가 아니었다. 다만 그의 부모는 오전 6시 20분 버스를 타고 학교에 갔다가 종합학원과 피아노 학원까지 마치고 오후 10시에 오는 아이가 "외국에서 공부하고 싶어요"라고 했을 때, 무시하지 않았을 뿐이다. 병훈의 어머니는 동네의 시골 교회 목사님과 그 지인들을 통해 LA 오렌지카운티의 김영하 목사님을 알게 됐다.
혼자서 LA에 있는 교회를 찾아간 병훈. 교회 청소를 하고, 영어도 배우며 한 달을 기다렸다. 그곳 목사님이 위스콘신 밀워키의 워러타운에 있는 '루터 프렙스쿨'을 소개해줬다. 1년 학비만 2만 달러(한화 약 2000만 원). 10대 소년은 그 돈이 얼마만큼 큰 액수인지 가늠할 수 없었다. 그러나 어머니가 남의 논을 빌려 농사지어서 번 돈의 대부분을 자신에게 보낸다는 것만큼은 알고 있었다.
"9학년으로 들어갔는데 제가 상상했던 자유로운 학교가 아니었어요. 오전 6시 반에 일어나서 오전 7시 20분에 첫 수업을 해요. 오후 10시에 기숙사 불을 무조건 끄고요. 어머니가 '농촌을 벗어나서 세상에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되어라'면서 저를 공부시켰어요. 그래서 화장실 변기에 앉아서 새벽 3시까지 공부했어요. 날마다 그러니까 수업시간에 코피를 한 바가지씩 흘렸어요. 애들은 제가 어디 아픈 줄 알았대요." 혈혈단신 유학생활 병훈은 한국에서부터 영어로 된 책을 읽을 수 있었다. 그러나 영어로 하는 말은 못 알아들었다. 당연히 영어로 말하지 못했다. 결국, 수업 내용을 이해할 수 없었다. 수와 식이 나오는 수학만 눈치껏 알아들었다. 수업이 끝나는 오후 3시 반, 전교생은 각자 예체능 수업을 들었다. 병훈은 학교 측에 자신의 사정을 얘기했다. 혼자만 빠져나와서 영어를 공부했다.
학교 다닌 지도 6개월, 병훈의 귀가 트였다. 선생님과 친구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을 수 있었다. 1년 지나서는 스스럼없이 말할 수 있었다. 3년째 되니까 시사 토론도 가능해졌다. 병훈을 '아시안'이라고, '원숭이'라고 기분 나쁘게 놀리는 말도 쏙쏙 귀에 들어왔다. 순식간에 병훈은 그 학생에게 주먹을 날렸다. 정학 15일, 병훈은 기숙사 독방에 갇히는 징계를 받았다.
"루터 프렙스쿨은 피아노가 의무였어요. 저는 초등학교 때부터 피아노를 쳐서 다른 친구들보다 잘 쳤죠. 다들 잘한다니까 '대학 가서 피아노 할까' 생각했죠. 부모님은 '피아노 치려고 거기 갔느냐'면서 화를 내셨고요. 생각이 많았어요. 제가 초등학생 때부터 농사일 도왔거든요. 마침 농업 부분이 굉장히 발전한 대학을 알았어요. 농업경영, 저한테 딱 맞잖아요."
병훈이 가려는 대학은 1년 학비 수천만 원. 집과 자동차도 따로 구해야 했다. 어머니가 "대학은 네가 알아서 가"라고 한 말을 새기고 다닌 병훈은 고민이 깊어졌다. 대학 진학의 첫발을 어디에, 어떻게, 디뎌야 할지 엄두가 안 났다. 미국에 와서 다닌 고등학교 4년, 토익과 토플 점수도 높은 병훈은 짐을 쌌다. 한국으로 돌아가서 군대부터 가자는 결정을 내렸다.
한국에 돌아왔지만... '유학물' 먹고 시큰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