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기밥솥에 넣어 놓은 쌀. 이시가기 전 이렇게 해야 밥을 굶지 않는단다
신광태
"내 이럴 줄 알았다. 그렇게 말을 했는데, 또 고주망태?" 공교롭게도 아내와 약속한 날, 퇴근 후 집주인 어르신과 두어 잔 마신 이별주에 꽐라가 됐다. 2년간 계약하고 채 8개월도 되지 않아 나간다는 말을 한다는 게 참 힘들었다. 집주인은 어디서 들었는지 '집사서 이사 가신다며? 축하해요'라는 말과 함께 한잔을 제의했다. '오늘이 손 없는 날이라 미리 가서 자야하기 때문에 안 돼요'라고 말할 순 없다. 한 잔 두 잔 마시다 그만 고주망태가 됐다.
술에 취했다고 봐줄 아내가 아니다. 내 손에 날카로운 가시가 박힌 엄나무와 바가지 그리고 팥 한줌이 쥐어졌다. 밥통과 이불은 아내가 들었다. 엄나무는 이사 갈 때마다 가지고 다녔다. 그걸 출입문 상단에 붙이면 잡신들이 찔릴까 두려워 감히 들어오질 못한단다. 현관에 팥을 뿌리는 행위는 아마도 동짓날 팥죽을 쑤어 액땜을 한 것에서 유래된 듯하다.
이런데 그놈의 바가지가 문제였다. 아내는 시장을 반나절은 돌아다녔지만 구하지 못했다고 투덜댔다. 하긴 과거 농촌에서나 볼 수 있었던 박을 구하기 쉽겠나. 한동안 말이 없기에 포기한 줄 알았다.
"같은 바가진데 뭐 어떻겠어."아내는 결국 시장에서 플라스틱 바가지를 하나 샀다. 우리 부부는 그걸 깨고 너무도 당당하게 아파트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곤 가져온 밥통에 쌀을 담고 텅 빈 주방에 덩그러니 놓아두었다.
쌀을 담아 두는 것, 무슨 의미일까. 모를 땐 인터넷 검색이 최고다. 옛날 사람들은 이사할 때 가마솥에 쌀을 안쳐 가지고 들어갔다. 먹을 것이 흔치 않던 시절, 가족들이 굶지 않고 풍족하게 살길 바라는 풍습에서 비롯된 듯하다. 가마솥을 구하지 못한 아내가 전기밥솥에 쌀을 담아 놓아 둔 광경이 우습다. 그래도 웃으면 안 된다. 부정 탄다고 나무랄 게 빤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