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풍백화점이 있던 자리에 신축된 주상복합 아파트 아크로비스타서울 서초동 삼풍백화점 자리에는 주상복합아파트인 아크로비스타가 2004년 완공되었다.
전상봉
1989년 12월 1일 문을 연 삼풍백화점은 서울 강남의 명품백화점이었다. 강남 부유층이 주고객이었던 삼풍백화점은 강남의 부와 특권을 상징했다. 그러나 그 화려함의 이면에는 부패와 비리와 탐욕이 자리하고 있었다.
삼풍백화점의 붕괴는 설계, 지반공사, 시공, 감리, 설계변경, 가사용, 준공검사, 증축의 과정에서 누적된 비리와 부실이 빚어낸 결과였다. 원래 삼풍백화점 부지는 아파트지구로 백화점이 들어설 수 없는 곳이었다. 그러나 아파트지구였던 부지가 지구중심지역으로 변경(1986. 5)되면서 건축승인을 받을 수 있었다. 삼풍 측에 막대한 이윤을 안겨주는 부지의 용도 변경에 비리가 개입되었을 것이라는 의혹이 일었다.
1987년 9월 삼풍백화점 건설공사가 시작됐다. 설계와 감리사는 우원건축이었고, 시공사는 우성건설이었다. 건물은 지상 4층에 지하 4층으로 설계됐다. 공사가 시작되자 삼풍 측은 매장을 한 평이라도 늘리기 위해 끊임없이 설계변경을 요구했다. 급기야 삼풍 측은 4층까지 매장으로 설계됐던 건물구조를 바꿔 5층까지 매장으로 만들어 달라고 요구하기에 이르렀다.
결국 우성건설은 1989년 1월 시공권을 삼풍건설에 넘겨줬다. 삼풍그룹 계열사인 삼풍건설이 시공사로 참여하면서 건물은 5층으로 설계 변경됐다. 관계 전문가의 검토를 거치지 않은 불법적인 설계변경이었다.
1989년 11월 삼풍백화점이 완공됐다. 처음 설계와 달리 지어진 건물에 준공승인이 날 리 없었다. 준공승인 받기가 여의치 않자 삼풍은 가사용 승인이라는 편법을 통해 1989년 12월 1일 백화점을 개장했고, 준공승인은 9개월이 지나서야 받을 수 있었다.
매장 공간의 확대를 위한 건물의 구조변경은 개관 후에도 계속됐다. 공간의 확대를 위해 수시로 벽을 헐었고, 설계에 없던 에스컬레이터를 설치하기 위해 각층 바닥을 뚫었다. 그 결과 삼풍백화점의 안정성은 더욱 취약지고 말았다. 증축과 구조 변경에 따른 처벌은 벌금 몇 푼을 내면 그만이었고, 담당 공무원들은 뇌물로 입막음했다.
총체적인 비리와 불법 위에 지어진 건물이 멀쩡할 리 없었다. 삼풍백화점은 개장한 순간부터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했다. 개장 직후부터 원인 모를 미세한 진동이 발생했고, 천정에서 물이 새는 등 위험 징후가 나타났다. 그러나 회장 이준을 비롯한 삼풍백화점 경영진은 돈벌이에만 몰두할 뿐 고객들의 안전은 관심 밖의 일이었다.
탐욕에 눈 먼 악마들"여보쇼. 무너진다는 것은 다시 말해서 손님들에게도 피해가 가지만, 우리 회사의 재산도 망가지는 거야!"붕괴 사고 이틀 후인 7월 1일 서초경찰서에 출두한 이준 삼풍백화점 회장은 기자들을 향해 이렇게 말했다. 그 순간 일제의 밀정이었고, 중앙정보부 창설 멤버로 돈의 단맛에 중독된 그의 이력이 얼굴을 스쳤다.
국민들의 분노와 질타가 쏟아지는 가운데 붕괴 사고의 책임을 물어 25명이 구속됐다. 이들의 혐의는 업무상과실치사, 업무상횡령, 뇌물공여 및 뇌물수수, 허위공문서작성 등 다양했다. 회장 이준에게는 업무상 과실치사, 뇌물공여 등의 혐의가 적용됐다.
해가 바뀐 1996년 8월 23일 피고인들에 대한 대법원의 확정 판결이 내려졌다. 이준 삼풍그룹 회장은 업무상과실치사상죄가 적용돼 징역 7년6월이 확정됐다. 2심에서 징역 7년형을 받은 사장 이한상은 상고를 포기하여 이미 형이 확정된 상태였다.
뇌물을 받고 삼풍백화점의 설계변경을 승인해준 전 이충우 서초구청장과 황철민에게는 뇌물수수가 적용됐다. 이충우에게는 징역 10개월에 추징금 3백만 원이, 황철민에게는 징역 10개월에 추징금 2백만 원이 선고됐다.
삼풍 참사는 국민들에게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연속적인 대형 참사에 국민들의 공포와 불안감은 커졌다. 이런 가운데 김영삼 정부는 1980~1990년대 초반에 지어진 건물들에 대한 안전 진단을 실시했다. 진단 결과 안전한 건물은 2%에 불과했고, 나머지 대부분의 건물은 보완공사가 필요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준 삼풍백화점 회장이 7년6월의 형기를 마치고 출소한 때는 2003년 4월이었다. 당뇨와 고혈압, 신장병으로 투병하던 그는 출소 후 6개월이 지난 2003년 10월 사망했다. 탐욕에 눈이 멀어 돈벌이에 혈안이 되었던 그의 삶은 그렇게 끝났다.
이준의 둘째 아들 이한상은 2002년 10월 출소 후 선교사가 되어 몽골에서 선교활동을 하고 있다(그는 2009년 목사 안수를 받았다). 이한상은 출소 후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삼풍 사고가 영적인 전쟁의 한 사건"이라면서 "저와 함께 고난을 받으신 많은 분들의 고난과 헌신이 귀하게 쓰여 하나님 이루시는 일에 진보가 있다면 감사할 뿐"이라고 했다. 수많은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아넣고도 진정어린 반성과 사과가 없는 그의 넋두리는 악마의 주술과도 같았다.
코스프레 되는 참사의 고리를 끊어야 한다삼풍백화점 붕괴 참사로부터 20년이 지났다. 삼풍 참사 이후에도 크고 작은 재난사고가 이어졌다. 여전히 부패와 비리는 지속되고 있고, 투명사회는 멀고 아득하다. 역설적이게도 대한민국은 사람보다는 돈이 먼저인 사회라는 사실을 각종 참사가 반증한다.
이윤을 위해서라면 국민의 안전과 생명은 쉽게 무시된다. 이런 상황에서 참사는 현재 진행형이다. 400명이 넘는 승객이 타고 있는 배가 침몰하고 있는데도 정부는 구조작업은 하지 않고 수수방관했다. 세월호 참사로부터 1년이 더 지났지만 진실은 아무 것도 밝혀진 게 없다. 정부가 하는 일이라곤 잊으라는 강요와 공안탄압뿐이다.
메르스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른 것도 국민의 안전과 생명보다는 병원의 이익과 명예를 앞세운 결과다. 대통령의 무능력은 하늘을 찌르고 정부의 기능은 마비됐다. 국민들의 안전과 일상이 파괴되고 있는데도 집권 여당은 메르스 사태를 자신들이 진정시켰다고 혹세무민하는 펼침막을 내걸고 있다.
초동대처에 실패해 메르스를 확산시키고도 사회불안 조장하는 유언비어 운운하면서 유포자를 엄중 처벌하겠다는 겁박에는 신속하다. 지지율이 떨어지자 대통령은 학교와 가뭄으로 타들어가는 논을 찾아 민생행보 연출에 안간힘이다.
서울 서초구 양재동 시민의숲에 가면 삼풍백화점 붕괴로 유명을 달리한 희생자들을 기리는 '삼풍참사위령비'를 만날 수 있다. 희생자를 추모하기 위한 위령비는 돈의 논리로 인해 사고의 현장이 아닌 이곳에 1998년 6월 27일 세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