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산 혁신교육지구 내 일반고 학생들의 진로탐색을 위한 '얼리버드 프로그램'에 참가해 네일미용수업진행 되고 있다.
이희훈
지난달 26일 오후 6시 경기도 오산시 세교고등학교의 한 교실. 다른 학교 교복을 입은 학생들이 몰려들었다. 학생 20여 명이 길게 이어붙인 책상에 마주 보고 앉았다. 이들 앞에 놓인 것은 교과서가 아니었다. 매니큐어를 비롯한 네일 미용 세트였다.
매홀고 2학년생 이수정(16)양은 앞에 앉은 짝꿍의 손톱에 얼굴을 바짝 가져다댔다. 푸셔를 이용해 손톱 뿌리 쪽에 있는 각질층인 큐티클을 손톱 바깥으로 밀어낸 뒤, 큐티클 제거기인 니퍼를 사용해 손톱을 깨끗하게 정돈했다. 네일 폴리시(매니큐어)를 조심스럽게 손톱에 발랐다. 이어 리무버로 손톱을 깨끗하게 만든 뒤, 다시 폴리시를 칠했다. 네일 미용 수업을 진행한 실용전문학교 출신 강사가 "잘하고 있다"며 칭찬했다.
네일 미용 수업은 오산 혁신교육지구 내 일반고 학생들의 진로탐색을 위한 '얼리버드 프로그램' 중 하나다. 일반고에서 제 꿈을 찾지 못하는 학생들을 위해 다양한 교육과정을 제공하기 위해 마련됐다. 대학이나 전문학교의 교수들로 강사진을 꾸려 수업의 질을 높였다. 지난해 관광경영 과정이 처음 생겼고, 올해는 네일 미용을 포함하는 뷰티 과정과 방송예술 과정이 마련됐다. 120여 명의 학생들이 매주 두 차례 수업을 받는다. 주말에도 실습이 잡혀 있다.
수정양은 얼리버드 프로그램을 접한 것을 두고 "운이 좋았다"고 말했다. 경기도 화성시 병점동에 사는 수정양은 예전부터 네일 미용에 관심이 많았다. 관련 특성화고에 가고 싶었지만, 문턱이 높았다. 중학교 내신 성적에 맞춰, 버스를 타고 30분 걸리는 오산의 일반고인 매홀고로 진학했다. 학원에 다니려고 했지만, 3개월 과정에 100만 원인 학원비가 큰 부담이었다.
수정양은 일반고에서 하릴없이 국·영·수 교과서를 펼쳐야 했다. "친구들과 놀기 위해서 학교에 갔다. 수업은 재미없었다"고 말했다. 학교 추천으로 얼리버드 프로그램을 접한 수정양은 "처음으로 학교에서 수업을 받는 게 재밌다. 지금은 학교에 남아서 꿈을 키우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미용학원에 다니는 친구에게도 학원에 가지 말고 얼리버드 프로그램을 함께 듣자고 얘기했다"면서 밝게 웃었다.
인구 20만 명의 작은 도시에 부는 변화의 바람 인구 20만 명의 작은 도시 오산에서 마을교육공동체의 바람이 불고 있다. 교사뿐만 아니라 지방자치단체, 학부모를 비롯한 시민들이 지역 교육 혁신에 힘을 합쳤다. 얼리버드 프로그램은 오산시에서 예산을 지원해 마련된 일이다. '꿈찾기 멘토스쿨' 프로그램에는 지역의 전문가, 대학생, 기업, 공공기관이 함께 했다. 150명의 멘토단이 오산 중·고등학생에게 진로에 대해 조언을 해주고 있다.
오산에서 커피숍을 운영하는 임주미(43)씨는 "2012년부터 학교에서 커피와 바리스타에 대해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학생들로부터 '진로에 큰 도움이 됐다'는 얘기를 들으면 뿌듯함을 느낀다"면서 "제가 나온 학교 후배들이나 내가 살고 있는 오산의 학생들이 진로에 대해 고민하고 경험할 수 있어서 참 좋다"고 말했다.
운천고 1학년생 도병현(16)군은 지난 3월 한 화장품 회사에서 이른바 향기 디자이너로 불리는 조향사를 만났다. 병현군은 "화학과 향기를 좋아해서 '꿈찾기 멘토스쿨' 프로그램에 지원했다"면서 "진로에 큰 도움이 돼 좋았다"고 전했다. 지난해 병현군처럼 꿈찾기 멘토스쿨에 참여한 학생은 모두 8904명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오산의 교육 여건은 좋지 않았다. 초등학교 교장 출신인 고일석 오산시혁신교육센터장은 "인구 20만 명의 오산은 수원·화성 등 인근 대도시에 비해 생활환경이 좋지 않다. 교장·교사들은 4년 동안 교육철학을 펼치기보다 2년 근무한 뒤 오산을 떠나려고 했다"면서 "교육의 질적인 저하가 일어났다"고 지적했다. 아이가 초등학교 고학년에 진학하면, 대도시로의 이주를 고민하는 게 오산 학부모들의 공통적인 고민이었다.
이후 오산시는 2010년 경기도교육청의 혁신교육지구 사업 공모에 뛰어들었다. 오산시를 비롯해 6곳이 혁신교육지구로 지정됐다. 올해 사업 마지막 해를 맞는 오산 혁신교육지구는 교육청과 지역사회가 힘을 합쳐 큰 시너지 효과를 내고 있는 곳으로 평가받는다. 오산시와 교육청이 함께 만든 오산시혁신교육지원센터는 전국 최초로 설립됐다. 오산시가 적극적으로 나선 탓이다. 올해 예산 44억4000만 원 중에서 오산시가 30억9400만 원(69.7%)을 낸다. 오산시만의 혁신학교 브랜드인 물향기학교도 선정하고 있다. 2011년 3곳이었던 물향기학교가 올해 28개 학교로 늘었다.
시민들의 참여도 오산 혁신교육지구의 큰 특징이다. 스터디를 꾸려 공부한 뒤 학교 등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학부모가 316명에 달한다. 학생들이 오산의 17개 주요 시설을 탐방하는 프로그램인 시민참여학교에서는 학부모 104명이 교사로 활동하고 있다. 지난해에만 2만150명의 학생이 시민참여학교를 다녀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