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서분교에서 내려다본 마을 풍경2011년 폐교된 여서분교는 2013년 개봉된 <남쪽으로 튀어>의 주요무대다. 학교는 마을 맨 꼭대기에 있어 마을이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김정봉
영화의 주요배경으로 등장하는 들섬분교는 2011년 폐교된 여서분교다. 교사(校舍) 꼭대기에 '꿈을 키우는 들섬 어린이'라는 문구가 아직 선명하게 남아 있어 여서도를 들섬으로 착각하는 사람이 많다.
현재 30여 가구, 50여 명이 한 식구처럼 살아가고 있다. 여러 성씨가 어울려 살다보니 핏줄은 뒷전이요, 이웃 간 정으로 살아가고 있다. 일제강점기 때 300가구가 살았고 60년대 말에는 180가구에, 분교 학생 수만 180명이었다.
내가 묵었던 민박집 주인이 입에서 입으로 떠도는 마을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나도 들은 건디, 여서 나는 물자(物資)는 고구마와 보리가 전부였다는 디, 이걸로는 두 달도 못 버텼댜. 그라도 섬인지라 바닷고기로 염장질햐서 육지로 나가 생계를 유지하지 않았것소. 그 당시 지붕은 초가라 육지에서 실코 온 건 지붕 이을 짚과 옷이며 보리, 쌀이었당게. 쌀은 귀하디귀한 거라 이 섬에서 제일가는 부잣집 딸도 쌀 한말을 먹지 못하고 시집갔다 들었소." 이 섬의 맨 처음 이름은 남을 여(餘)에 쥐서(鼠), 여서(餘鼠)였다. 재미있는 이름이긴 한데 마을이름에 쥐가 붙어 있으니 꽤나 거슬렸을 게다. 조선 고종 대에 이르러 곱고 상서로운 마을, 여서(麗瑞)로 바뀌었다. 마을 돌비석에 유래가 적혀있다. 고려 때 7일간 대지진이 일어나 바다 속에서 거대한 산이 솟아오르자 고려 때 솟아난 상서로운 산이라 하여 여서라 했다나. 돌비석 말마따나 '천지개벽의 전설'을 안고 있는 섬이다.
돌비석에는 '60년대까지만 해도 갈치, 멸치, 고등어, 도미, 농어, 돌돔이 많이 잡혀 물반, 고기반이란 속성까지도 있었다'는 재미난 말도 있다. 이런 속성(屬性)은 지금도 이어져 낚시꾼들이 모여든다. 이 섬에 하나밖에 없는 대중교통, '섬사랑7호'배에 탄 외지인은 대부분 낚시꾼이고 한두 명은 용케 알고 찾아온 돌담 구경꾼이다. 나는 그 중 하나, 돌담구경꾼.
바람이 만든 돌담의 나라, 여서도담 구경하러 여기저기 다녀봤으나 여기만큼 높고 깊은 돌담을 구경하지 못했다. 바람이 그렇게 만들었다. 여서도, 바람이 만든 돌담의 나라다. 바람 앞에서는 사람이나 소나, 곡식 모두 마찬가지, 피해야 할 대상이요, 막아야할 대상이다. 왜적이나 해적을 막을 거라면 이토록 야무지게 쌓지도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