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일 오후 서울 중구 프란치스코회관에서 대법원긴급조치국가배상 판결 규탄 토론회가 열리고 있다.
이희훈
그러나 10년이 채 지나지도 않아 믿음은 다시 흩어졌다. 과거사 청산은커녕 국가에 면죄부를 주는 판결을 잇달아 내놓던 대법원은 3월 26일 쐐기를 박았다. 이날 대법원 3부(주심 권순일 대법관)는 긴급조치가 나중에 위헌으로 판명나긴 했지만 당시 유신헌법에 근거한 긴급조치권 행사는 문제가 없다고 했다. 여기에는 국가가 피해자에게 배상할 책임 역시 없다는 결론이 더해졌다.
"대통령의 긴급조치권 행사는 고도의 정치성을 띤 국가행위로, 이 일은 국민 전체에 대한 관계에서 정치적 책임을 질 뿐, 국민 개개인의 권리에 대응해 법적 의무를 지지 않는다." ☞ 과거사 피해자들, 헌재에선 웃고 대법원에선 울고22일 한상희 건국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로스쿨) 교수는 이 판결을 두고 "너무나 문제가 많아서 무엇부터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입을 뗐다. 그는 "대법원과 헌재 모두 긴급조치를 위헌이라고 하고선 대통령이 긴급조치를 선언하는 행위는 통치행위라 법원이 판단하면 안 된다고 한다"며 "제가 주먹을 뻗어서 앞에 있는 사람을 치는 것은 잘못됐지만 손을 뻗은 것은 잘못이 아니라는 희한한 얘기"라고 했다.
문병효 강원대 로스쿨 교수는 "긴급조치 발동은 대통령이 고의로 명백히 헌법에 반하는 조치를 한 것"이라며 "(국가가) 법적 책임을 지지 않는다는 (대법원의) 해괴한 논리는 어디서 나왔냐"고 비판했다. 그는 1996년 헌재가 김영삼 정부의 금융실명제를, 2004년 대법원이 김대중 정부의 대북송금을 통치행위라면서도 국민의 기본권을 지나치게 침해했다고 판단했다며 대법원 판결은 이 선례에도 맞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이재승 건국대 로스쿨 교수 역시 "대법원의 긴급조치 판결은 판사들이 유신시대로 돌아가서 유신 판사 역할을 충실히 한 결과"라고 혹평했다. 그는 이 판결뿐만 아니라 과거사 피해자들이 국가배상금을 청구할 시효기간을 '재심 무죄판결 확정일로부터 3년 내'에서 별 다른 근거 없이 '6개월'로 줄여버린 일을 두고도 "법원이 권리의 조력자가 아닌 봉쇄자가 됐다"고 꼬집었다. 이어 "(국가배상금 청구)시효가 6개월인 나라는 어디에도 없다"고 했다.
☞ <7번방> 실제 주인공이 바라는 마지막 선물은?문제는 뾰족한 수가 없는 현실이다. 과거사 청산은커녕 퇴행하는 대법원 판결이 잇따르자 하급심 판사들의 고민이 깊어졌다. 몇몇 판사들은 대법원의 법리를 파고들어 국가의 배상책임을 인정하려고 힘썼고, 그 노력은 판결로 이어졌다. 하지만 지금의 대법원에서 그 판결들이 유지될까? 전망은 밝지 않다. 현재의 사법체계 안에선 대법원의 최종 결론을 뒤집을 절차 역시 존재하지 않는다.
토론회 참석자들은 '입법'으로 길을 찾아야 한다고 했다. 2012년 새누리당 하태경 의원과 새정치민주연합 전해철·정청래 의원이 각각 만든 긴급조치 피해자 구제법안도 있다. 그런데 세 법안은 3년째 국회에서 잠자고 있다. 그나마 전해철 의원안은 소관상임위 심사가 진행 중이지만, 언제 결론이 날지 모른다. 이 법안들은 내년 4월 19대 국회 임기가 끝나면 자동으로 폐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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