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수십 번 대신 장을 봐 드립니다제가 맡고 있는 업무는 고객들이 인터넷 쇼핑몰에서 주문한 품목 대로 대신 장을 보고 배송을 맡기는 일입니다. 하루에도 무거운 업무용 카트를 밀며 큰 매장을 수십 바퀴 돌아야 합니다.
김지은
저는 지금까지 최저임금이 누구에 의해, 어떻게 결정되고 그로 인한 파장이 얼마나 큰지 단 한 번도 생각하지 못한 대한민국의 국민이자 그저 평범한 주부였습니다. 아껴 쓰고 쪼개 쓰며 아이 둘을 키우다 보면 그래도 지금보다 나아지겠지 생각했던 꿈은 물거품이 된 지 오래입니다. 20여 년 동안 열심히 살았지만 변변한 내 집 하나 장만하지 못했습니다.
남들 다 보내는 흔한 학원 한 번, 과외 한 번 시켜주지 못하고, 메이커가 뭔지도 모른 채 5천 원, 만 원짜리 옷도 감사하게 생각하는 아이들을 마음 아프게 바라보며 키웠습니다. 아이들 만큼은 열심히 공부해서 부모보다 더 나은 직업을 갖고 미래를 꿈꿀 수 있는 건전한 사회의 일원이 되어 줄 것을 소망했습니다.
이렇게 가슴 졸이는 것 말고 특별히 해줄 게 없는 부모의 심정은 이루 말할 수 없이 미안하고 또 미안했습니다. 부모로서 뒷받침 해줄 것이 없는 상황에서 아이들이 인문계에 가면 대학 진학은 꿈도 못 꿀 것이고, 제대로 된 직업마저 갖기 힘들 것 같아 특성화고에 보냈습니다.
큰 딸은 특성화고에서 좋은 선생님과 친구들을 만나 열심히 공부하며 작은 희망을 가졌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엄마, 집안 형편이 어려우니, 일단 취업을 먼저 하고 나중에 대학에 가도 될 거 같아서 취업 신청을 했어"라고 딸이 말했습니다. 너무나 미안한 마음에 가슴이 먹먹했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공부에는 때가 있는 거다' 싶어 취업을 미루고 더 나은 미래를 위해 대학 진학을 설득했고, 학교 이름보다는 취업률 좋고 전문직을 택할 수 있는 간호대에 진학하길 권유했습니다.
대학을 가더라도 돈 걱정 없이 공부만 할 수 있는 세상이 아닌지라, 학자금 대출은 필수 코스였습니다. 대학 입학 후 1학기 등록금만 내주고 나머지는 '장학금과 학자금 대출'을 받아 아이들이 스스로 해결하겠노라 약속했습니다.
그렇게 두 딸 모두 간호대에 진학하여 큰 딸은 2년차 간호사, 둘째딸은 간호대 3학년생입니다. 요즘 같은 취업난 속에 그래도 전문직인 간호사 엄마라고 주위에서는 부러워합니다. 두 딸이 하고 싶은 것이 아닌, 현실을 택하도록 권유한 엄마의 마음은 찢어지는데 말입니다.
엄마, 아빠는 여전히 최저임금 노동자입니다. 가난을 대물림 하지 않으려고 20여 년을 땀 흘려 일해 왔지만, 대한민국 가장들의 설자리가 5580원의 최저임금이라면 무슨 꿈을 더 꿀 수 있을까요?
죽지 않을 만큼 간신히 숨만 쉬고 살아가는 저임금 노동자가 600만 시대라는데, 이 사회에서 무슨 미래가 그려지며 더 나은 내일을 꿈꿀 수 있을까요? 수백만 저임금 노동자들이 100만 원 남짓한 월급으로 생계를 꾸려나가는데, 그 아이들에게 무엇을 해 줄 수 있을까요?
사회에 발을 디디자마자, 저임금-비정규직으로 살아가야 하는 우리 아이들을 "쉽게 빠지고 벗어나기 힘든 저임금의 늪"에서 구해내는 길이 '천운'밖에 없는 걸까요? 대한민국 40, 50대 가장은 할 말이 많습니다. 나라를 살리고자 모든 것을 내던진 엄마, 아빠들이 이제는 나라가 나서 대한민국의 미래를 다시 열어야 한다고 당당히 말하고 싶습니다.
나라 망할까봐 돌반지, 결혼 패물 팔아준 우리 시대 가장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