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도원 박사
김명곤
내가 해방을 맞은 것은 안주 중학교에서 기숙사 생활을 하고 있을 때였다. 한국인 학생들이 다니던 우리 학교는 물론, 다른 일본계 학교 학생들도 안주 인근에 비행장을 건설한다며 날마다 학생들을 동원하여 땅을 고르거나 돌을 나르게 하는 등 노역을 시켰다. 1학년 때만 해도 그런대로 수업일을 지켜 공부를 시켰으나, 2학년에 이르러서는 수업은 뒷전으로 미루고 작업에만 매달리게 했었다.
당시 일본군이 계속 패주하고 있으며, 소련이 곧 참전하게 되어 전세가 일본에게 더욱 불리해 질 것이란 소문들이 암암리에 나돌고 있었다. 동네 어른들 사이에서는 1930년대 후반부터 만주 지역의 항일 무장 유격대가 우리 동네에서 그리 멀지 않은 함경도 보천군의 일본 경찰서를 비롯한 관공서를 습격하여 일제의 간담을 서늘케 했다는 무용담이 나돌고 있었고, 40년대 초반을 지나 중반에 가까워 지면서 일본군이 패주하고 있는 조짐들이 나타나고 있었다.
어느날부터 일본 순사들을 동원한 군청 직원들이 우리 동네에 나타나 놋그릇이란 놋그릇은 모두 뒤져서 가져가기 시작했다. 학교에서 돌아온 어느날 어머니가 한쪽 툇마루에 주저 앉아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연신 혀를 차던 장면이 떠오른다. 시집올 때, 그리고 대식구들의 식생활과 농사철 일꾼 밥상을 차리기 위해 이래 저래 장만한 놋그롯들을 몽땅 공출 당했던 것이다.
어수선하고 팍팍하던 시절을 지내던 어느날 해방의 소식이 들려왔다. 나중에 들으니 다른 지역에서는 '어느날 갑자기 도둑같이 온 해방'의 기쁨에 거리로 몰려나와 만세를 부르는 사람들도 있었다고 하지만, 내가 안주에서 맞은 해방은 비교적 조용했다. 후창이나 안주 지역은 비교적 소도시 지역이기도 했고, 이미 전쟁의 뒷끝이 보이던 국경지역이어서 였는지 담담한 분위기로 해방을 맞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해방 며칠 후부터 이미 상당수의 선생님들은 학교를 떠나기 시작했고. 학생들도 하나 둘씩 짐을 꾸려 고향으로 향하면서 학교는 텅 비어 가고 있었다. 너도 나도 떠나는 분위기에서 나도 서둘러 짐을 챙겨 고향으로 돌아왔다. 이후로 기약도 없고 생경하기만 한 새로운 세상에서 2년여간의 '방학'을 체험해야만 했다.
"로스케가 온다!"... 시계를 주고 자전거를 얻다해방 초기는 기대감과 동시에 불안감으로 어수선하고 혼란스런 분위기였다. 거리에는 여전히 관청에 남아 있거나 미처 재산과 살림을 챙기지 못한 일본인들과 생판 처음 보는 소련군들이 뒤섞여 활보하고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더욱 밀려들기 시작한 소련군이 북쪽 지역 중소 도시는 물론 시골 마을에 까지 들어 오면서 불안은 커지기 시작했다.
거의 거지 꼴을 한 남루한 옷에 얼굴에 팔뚝에 수염과 털이 숭숭 난 소련군들이 양곡이나 채소를 강탈하는 것은 물론, 여자들을 겁간한다는 소문이 나돌기 시작하면서 공포 분위기가 감돌았다.
이들은 아무 밭에나 들어가 오이를 따서는 우적우적 씹으며 다녔고, 베개만한 큰 빵을 옆구리에 끼고 다니며 식사를 해결했다. '로스케'로 불린 이들은 노소를 가리지 않고 여자란 여자는 모두 잡아 가고, 남아 있던 일본 여자들까지 표적으로 삼는다는 얘기가 나돌았다. 어느 곳에서는 참다 못한 조선인 청년들이 소련 병사들을 폭행했다는 얘기까지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