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팔 이재민 위해 빵 구우러 네팔로 갑니다

2년 9개월만에 귀국하는 네팔인 아내와 나

등록 2015.06.08 16:16수정 2015.06.08 1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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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팔인 아내에게 성금을 전달하는 해우재 이원형 사무국장 수원에 있는 미스터 토일렛 해우재 이원형 사무국장이 아내에게 성금과 시장가방을 선물로 전하고 있다.
네팔인 아내에게 성금을 전달하는 해우재 이원형 사무국장수원에 있는 미스터 토일렛 해우재 이원형 사무국장이 아내에게 성금과 시장가방을 선물로 전하고 있다.김형효

지난 4월 25일 네팔시각 정오 규모 7.9의 대지진이 발생한 이후 한 달 하고 2주일이 지났다. 한국에도 최근 메르스 공포로 어둠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사람이 사는 데 공포가 없어야 한다는 사실을 절감한다.

2004년 나와 인연을 맺은 네팔. 지진 이후 네팔은 더욱 측은지심이 느껴지고 아픔이 느껴지는 나라였다. 그것이 비단 내 아내의 나라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아내를 만나기 전부터 인연이었던 그 나라 사람들이 내게 보여준 인상이 그랬기 때문이다.

처음 카트만두 시내를 걷던 때, 사람들의 얼굴이 모두 자상해 마치 부처의 얼굴을 보는 것 같았다. 어린 아이들, 어른들, 그리고 릭샤를 끄는 사람들, 작은 찻집에 사람들이 모두 그랬다. 작은 상점 점원도 깊은 영혼이 휘감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아이 엄마의 안타까운 손길  지진 발생 후 먹는 문제에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에게 음식을 제공하기 위해 떠나기로 했다. 한 아이 엄마의 안타까운 손길
아이 엄마의 안타까운 손길 지진 발생 후 먹는 문제에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에게 음식을 제공하기 위해 떠나기로 했다. 한 아이 엄마의 안타까운 손길 김형효(랄라 구릉의 페이스북)

지진 이후 경기 남부 지역 네팔인들과 함께 지진 이후 수원역 앞에서 네팔인들을 위로하는 행사를 열기도 했다.
지진 이후 경기 남부 지역 네팔인들과 함께지진 이후 수원역 앞에서 네팔인들을 위로하는 행사를 열기도 했다.김형효

지진 이후 더 자주 연락하며 그 어느 때보다 지극한 눈으로 네팔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내린 나의 결론은 "네팔로 가자"였다. 그것은 내가 알고 지내는 네팔과 네팔 사람들에 대해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도리를 하는 것이었다. 그것이 내가 네팔을 가기로 결론을 내린 이유다. 그리고 다시 해야할 일을 찾았다.

34년 전 난 먹고 사기 위한 방편으로 빵 만드는 기술을 배웠다. 그래서 그 기술을 이용해 빵을 만들어 네팔의 집 잃은 어린 소년, 소녀와 어려운 사람들에게 제공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물론 그 결론을 내리기까지 몇 단계 과정이 있었다.   

나는 지진이 난 다음 날 저녁부터 페이스북을 통해 '네팔지진피해자 구호를 위한 성금 모금과 구호물품 모금'을 시작했다. 더불어 페이스북 친구들과 사적으로 알고 지내는 지인들에게 문자메시지를 전송하기도 하였다. 하루, 이틀 성금이 모아지고 액수는 늘어갔다. 하지만 네팔 현지에서 들려오는 소식은 좋지 않았다. 인간의 욕심이 상처 난 사람들 속에서도 못되게 발현되고 있었다. 성금 모금은 잘 이루어졌지만 지원을 멈추게 된 이유다.

고민을 더하며 지인들과 페이스북 친구들을 통해 연락이 오가기도 하고 도울 방법을 묻는 사람들도 있었다. 어떤 사람은 옷을 보내주기도 하였고 네팔에서 지진을 경험하고 돌아오신 분 중에서는 현지에서 쓰고 남은 네팔 루피를 직접 집으로 가져다주기도 했다. 사명은 더욱 강하게 주어지고 있었다. 기대를 만드는 것은 기대하는 사람들이 있어서란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보름이 지나자 모금은 주춤해졌고 의류는 더 많이 모였다. 한 김 만드는 회사에서는 300박스 정도의 김을 현물로 보내주었고 지인들은 그 김을 소비자가보다 조금 싸게 사주었다. 곧 현금화 되었고 250만 원이 넘는 성금으로 조성되었다. 많은 분들의 도움이 있었다. 밴드 모임인 멸치고래, 불사조 분들에게도 감사드린다. 아울러 네팔인 아내에게 한국어를 가르치는 수원 한국어강사 선생님들의 협조도 큰 격려가 되었다. 수원역 앞에서 함께 "Pray For Nepal" 행사를 주관해준 이주민센터와 이주민복지센터의 도움도 컸다. 

주변에 네팔인들은 한국 사람들에 희망의 메시지를 전달받고 기뻐하였다. 나라가 사라지는 것처럼 불안해하던 그들이 안정을 찾기 시작한 것은 한국 사람들의 정성을 보아서란 생각도 들었다. 모금액이 천만 원을 넘어섰을 때 고민이 더 깊어졌다. 당초 200~300만 원 정도 모아지면 네팔대사관에 전달하고 말려고 했는데... 성금을 주신 분들을 생각해 더욱 의미 있고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때 지진 피해자들을 돕기 위해 인도에서 보낸 음식이 상해 카트만두 공항에서 불도저로 매몰하는 사진을 보았다. 이어서 한 아이 엄마가 간난 아이를 품에 안고 한 손으로 식빵 조각을 받아드는 사진 한 장을 보게 되었다. 나는 순간 왈칵 쏟아지려는 눈물을 입술을 깨물고 참아냈다. 그리고 곧 제과설비를 갖추고 빵을 만들어 공급하자는 결론을 내리고 설비비 등 구체적 실천계획을 갖고 네팔 현지와 연락하면서 움직였다. 하지만 아직도 장소는 미정이다.

이미 한국에서 빵을 구울 철판과 식빵틀, 쿠키 만들 도구, 의류 등을 보냈다. 탁송료만 150만 원이 넘게 들었다. 이미 네팔 현지로 보냈고 현지에 도착해있다. 우리 부부가 오늘 운반해야 하는 짐도 120kg 정도가 된다. 이제 가서 추가적으로 빵을 만들 장소와 보급할 곳 등을 놓고 또 다른 계획을 세워 나가야 한다. 하지만 이미 던져진 주사위다. 지난 5월 31일부로 직장에는 사직서를 냈다. 아내와 나는 날이 밝은 6월 8일 한국 시간 오후 3시 40분(네팔 현지시각 12시 25분)카트만두 트리뷰반 국제공항에 발을 디딜 것이다.

축복을 기원하고 축복을 받으려면 스스로 축복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면서 마음을 다지고 있다. 할 수 있는 일을 하지 않는 것은 죄악이라는 믿음에 최선을 다할 것을 약속하며...

메르스로 심리적으로 매우 힘겨운 날들을 보내고 있는 모든 분들에게 무사와 안녕을 기원하며 행복하시길 바란다. 그리고 카트만두에서 인사를 드릴 것을 약속드린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e-수원뉴스에도 게재합니다.
#네팔 지진 구호활동 #네팔인 아내 먼주 구릉 #시인 김형효 #카트만두 #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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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사람의 사막에서" 이후 세권의 시집, 2007년<히말라야,안나푸르나를 걷다>, 네팔어린이동화<무나마단의 하늘>, <길 위의 순례자>출간, 전도서출판 문화발전소대표, 격월간시와혁명발행인, 대자보편집위원 현민족문학작가회의 회원. 홈페이지sisarang.com, nekonews.com운영자, 전우크라이나 예빠토리야한글학교교사, 현재 네팔한국문화센타 운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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