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름 걷힌 1900고지 북인도 올드 코사니의 차밭. 영국으로 수출을 할 만큼 질이 좋다고 한다.
송성영
짐을 풀어 놓고 돈을 지불하려 하자 나와 영어 수준이 엇비슷한 비놋씨가 손을 내 저으며 말했다.
"한 달 후에 지불하면 됩니다.""예?"나를 언제 봤다고, 중간에 인사말도 없이 사라지면 어쩌려고 선불을 받지 않겠다는 것인가. 이해가 잘 되질 않았다. 내가 지갑을 매만지며 머뭇거리고 있자 그는 내 의중을 간파 했는지 덧붙인다.
"락시미 아쉬람의 부럼 선생은 내 친구입니다. 그리고 당신을 믿습니다."그는 내게 저녁 식사를 대접하고 자신의 집을 '내 집처럼 여기시오'했던 부럼 선생을 통해 나를 믿고 있었다. 부럼 선생이 고마웠다. 두 차례의 만남으로 나를 철석같이 믿어 준 그가 고마웠다.
월세방에서의 첫날, 새벽 산책길을 나서기 위해 침낭 속에서 빠져 나왔다. 아직 방안이 어둡고 늦가을 날씨만큼 새벽 공기는 차갑다.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는데 침대 머리맡의 창문 너머 동쪽 산자락이 붉은 빛으로 물들기 시작한다. 방문을 열고 베란다로 나오자 탄성이 저절로 터져나왔다. 솟아오르는 붉은 햇살의 조명을 받아 거무스름한 어둠의 옷을 벗고 있는 만년설 히말라야의 여신 난다데비가 시나브로 흰 살결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밖으로 나섰다. 올드코사니로 향하는 산책길 앞으로 난다데비가 펼쳐져 있다. 민박집 주변에는 몇몇 호텔이 들어서 있는데 인도 사람들이 일출을 보기 위해 어깨에 두터운 숄을 두르고 호텔 베란다에 줄지어 있다. 하지만 올드 코사니를 향해 길을 걷는 사람은 나 혼자 뿐이다. 저 황홀한 여신과 단둘이 걷는 기분이다.
호텔을 벗어나 올드 코사니로 접어들 무렵 난다데비는 점점 구름에 뒤덮여 가고 산 아랫마을과 숲은 온통 구름에 뒤덮였다. 멀리서 보면 나와 내가 걷고 있는 이 길 또한 구름에 덥혀 있을 것이었다. 구름길을 얼마나 걸었을까? 아침 햇살이 숲 속 곳곳을 뚫고 들어와 구름을 거둬가기 시작한다.
아스팔트가 깔린 올드 코사니로 깊숙이 들어서자 농가조차 쉽게 보이지 않는다. 나중에 알게된 것인데 인적 드문 이 시골길에 아스팔트가 깔려 있는 것은 군사도로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어쩌다 전망 좋은 언덕 위에 자그마한 호텔이 들어서 있고 한두 채의 농가가 뜨문뜨문 들어서 있을 뿐이다.
길 위에 뿌려진 꽃잎들... 평화로웠다